그 바다에는 시인이 살고 있다… ‘로베르토 길 드 몬테스’

  • 베니스=윤다함 기자

입력 : 2022.07.15 21:10

[인터뷰]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참여작가
인물, 풍경 등 구상적 요소로 구현한 몽환적 화면
은유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에 ‘시(詩) 같은 그림’

Los poetas en el mar(2021). /베니스=윤다함 기자
Los poetas en el mar(2021),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rimanzutto Mexico City and New York, Photo by Gerardo Landa Rojano. /Kurimanzutto
Los poetas en el mar(2021). /베니스=윤다함 기자
 
베니스비엔날레를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미술애호가들로 수선스럽게 북적이는 아르세날레(Arsenale)에서 일순간 주위가 고요해지는 듯한 내적 정적을 경험했다.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은 청량함에 먼저 눈길이 갔고, 그 다음엔 가짜임에도 진짜 같은 초현실적 화면에 매료됐다.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로베르토 길 드 몬테스(Roberto Gil de Montes·72)의 회화 ‘Los poetas en el mar’(2021)을 마주하고는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발을 뗄라치면 자꾸만 화면 속의 인물들이, 동물들이, 오브제들이 채 아직 끝내지 못한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아무리 그들이 이야기를 쏟아내어도 이상하게도 주변은 적막하게만 느껴졌다.
 
길 드 몬테스의 회화는 인물, 자연경관 등 구상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화면 도처에 은유적이고도 서정적인 장치들이 자리하고 있다. 극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러티브적 오브제로부터 기인하는 열린 해석의 여지가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에 더욱 동화되고 공감되게끔 함으로써, 현실적인 초현실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은 다분히 시적이다.
 
Rio Grande, 2021, Oil on canvas, 40.08x70x1.97in. /Kurimanzutto
Lalo, 2020, Oil on canvas, 22.05x31.1x2.17in. /Kurimanzutto
Roberto Gil de Montes, installation views of The Milk Of Dreams,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rimanzutto Mexico City and New York, Photo by Nick Ash. /Kurimanzutto
 
길 드 몬테스는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The Milk of Dreams’에 참여 중인 멕시코 작가다. 올해 비엔날레 감독을 맡은 세실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가 지난해 5월 프리즈 뉴욕에서 그의 작품을 발견하고 비엔날레 본전시 작가로 초청했다. 특히 알레마니가 직접 선정한 ‘프리즈 뉴욕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다섯 명의 작가’ 중 한 명으로 회자되며 비엔날레 개막 전부터 주목받았다. 알레마니는 작가에 대해 “인물화와 일상적 장면을 결합하는 길 드 몬테스만의 방식에 반했다. 마술 같은 사실주의가 그의 캔버스에 가득하지만, 비현실적인 분위기에도 그가 다루는 소재들, 이를테면 정체성이나 젠더에 관한 것들이 놀라울 만큼 시의적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쿠리만주토(Kurimanzutto) 갤러리와 함께 다가오는 9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프리즈 서울’에 참가한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길 드 몬테스의 작업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다음은 작가와의 일문일답.
 
지난 4월 베니스를 찾은 작가. Photo by Lucy Foster. /Kurimanzutto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The Milk of Dreams’에 걸린 로베르토 길 드 몬테스 작품 설치 전경. /베니스=윤다함 기자
 
─총감독 세실리아 알레마니가 프리즈 뉴욕에서 작품을 보고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했다. 이번 비엔날레가 지난 10년간의 국제 활동에서 가장 주요한 전시 중 하나인데,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정말 생각지 못한 아주 기쁜 소식이었다. 알레마니가 내 작품을 처음 본 게 지난해 5월 프리즈 뉴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프리즈 기사를 통해 나를 프리즈 뉴욕에서 가장 주목할 작가 탑 5에 추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알레마니로부터 연락이 와 화상 전화를 했는데, 그때 나를 비엔날레 참여 작가로 선정했다고 이야기해줬다. 사실 어떤 내용으로 전시가 기획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비엔날레 오프닝에 갔다. 큰 행사에 내가 포함됐다는 것에 너무나 행복하고 동시에 겸허한 마음이 든다.
 
El Pescador, 2020, Oil on linen, 196x257x4.5cm.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rimanzutto Mexico City and New York, Photo by Gerardo Landa Rojano. /Kurimanzutto
El Pescador(2020). /베니스=윤다함 기자
 
─이번 전시에 총 5점의 회화를 내걸었다. 일부는 지난 개인전에서 이미 선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어떻게 선정된, 혹은 제작된 작품들인지 궁금하다. 출품작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El Pescador’(2020)가 쿠리만주토 멕시코시티에서 개인전 당시 걸렸던 작품이다. 나는 현재 휴가 때면 오곤 했던 여행지에서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다. 인구가 고작 1만5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어촌인데, 나는 어부들의 모습과 이미지가 참 좋았다. ‘El Pescador’는 기존에 내가 그린 조개 안에 시인이 있는 그림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한 것으로, 시인을 어부로 바꿔 그린 것이다. 어부에 대한 오마주와 같은 작업이다. 마을이 발전하고 커지며 어부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하더라. ‘Endangered Species’(2021) 역시 사라져가는 어부들과 연관이 있는 작업이다. 더불어 팬데믹을 관통하며 인류 또한 멸종위기종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나는 늘 자연과 나의 일상에서 예술적 영감과 아이디어를 찾곤 한다. 언젠가 내가 작업실에 들어가는 순간, 내 인물화 한 점이 위아래가 뒤집힌 채 바닥에 놓인 걸 발견했다. 그 순간 이를 소재로 거꾸로 있는 형상의 인물화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먼저 오래된 인형을 모델 삼아 오일 스케치로 두 가지 버전을 그렸는데, 하나는 매달려 있는 모양, 다른 하나는 떨어지는 형태였다. 그러나 결국 첫 번째 그림이 가장 좋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바로 ‘UP’(2021)이다.
 
UP, 2021, Oil on canvas, 116.5x85.5x4.5cm. /베니스=윤다함 기자
El monje(2021). /베니스=윤다함 기자
 
‘UP’과 비슷한 구도의 ‘El monje’(2021)에서 ‘monje'는 수행자를 뜻한다. 어느 날, 정원에서 풀과 꽃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문득 바닥에 떨어져 내 발밑에 있는 풀과 꽃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림에서 흩날리는 꽃들의 형상이 기인한 배경이다. 사실 작품 속 인물은 수행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입고 있는 옷이 수도자를 연상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해안풍경을 담은 ‘Los poetas en el mar’(2021)는 특정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나는 바닷가 풍경을 먼저 잡은 뒤, 그 위에 형상들을 더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림이 내게 말을 거는 듯한 감상에 사로잡혔는데, 아이디어들이 흡사 그들 스스로 형상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아마 나는 당시 무아지경 비슷한 것에 빠져있었던 듯하다. 
 
작품 제목 역시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다. 작가이자 시인인 내 친구가 작업실에 찾아온 적이 있다. 그녀는 런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알려주려고 온 것이었다.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나 역시 울었던 기억이다. 그녀가 작업실을 떠나고 나는 화면에다가 투명한 붉은 조개껍데기 위에 있는 시인들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나는 무아지경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 시적인 무언가를 그려내고 있었던 거다. 해당 제목 또한 그 친구가 찾아온 날 지은 것이다. ‘바다의 시인들’이란 뜻이다. 
 
Endangered Species, 2021, Oil on linen, 148.8x149.5x4cm. /베니스=윤다함 기자
Endangered Species(2021). /베니스=윤다함 기자
The Land Developer, 2021, Oil on canvas, 70.87x78.74x2.17in. /Kurimanzutto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그림이 말을 걸며 마법 같은 시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이 느껴진다. 아마 이런 감상이 내러티브적인 오브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테면, 거대한 조개들, 재규어 가면, 하늘에 흩날리는 꽃들 따위로부터 말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저들 오브제가 상징하는 바가 있나.
 
내 그림이 마법 같은 시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니 아주 멋진 말이다. 왜냐면 실제로도 내 그림은 그런 마법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내 작업에선 특정한 내러티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작은 단서와 힌트가 있고 나머지는 그 위로 쌓아 올려가며 발전시켜가는 식이다. 내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이 있는데, 앞서 질문한 가면 이미지라든지, 이런 건 사실 멕시코에서 아주 흔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멕시코에서 태어났으나 10대 때 미국에 이민을 오면서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경험하며 내 자신에 대한 본질 그리고 내 성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거듭하던 시기를 관통했다.
 
내가 그리는 오브제들은 다 실존하는 것들이다. 나는 내 작품이 어떠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열린 해석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내 그림을 마주하는 누구라도 특정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보는 이가 스스로의 내러티브를 만들어가고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화면에 나타난다. 누구는 가면을 쓰고 있거나, 거꾸로 서 있거나 혹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 인물은 누구이며,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델을 두고 그리진 않고 평소에 사람들을 관찰하곤 한다. 현재 나는 멕시코에서 살고 있기에 이전과 비교해 인물 표현에 쓰는 컬러들이 바뀌었다. 그림 속 인물들이 내가 실생활에서 매일 보는 사람들과 닮아있도록 말이다. 내가 인물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그들을 그릴 때에는 인물 하나하나에 존엄성을 불어넣고자 한다.
 
The Dream(2020). /Kurimanzutto
Boy on River, 2020, Oil on canvas, 10.83x17.91x2.09in. /Kurimanzutto
Chivito, 2021, Gouache on paper, 11.02x13.98in. /Kurimanzutto
 
─다채로운 컬러로써 몽환적이면서도 실제와 같은 장면을 표현해오고 있다. 작업에서 중시여기는 점은 무엇인가.
 
나는 구상화가로서,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실제처럼 보이는 풍경을 그리고 싶다. 그러나 완전한 실제라기보다는 영적인 측면에서의 또 다른 현실처럼 보이는 풍경이길 바란다.
 
─멕시코의 작은 해안마을 라 뻬니따 드 할템바(La Peñita de Jaltemba)에서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 ‘Los poetas en el mar’에 등장하는 바다 풍경이 현재 지내고 있는 그곳의 경치에서 기인했을 거라 짐작된다.
 
맞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환경, 주변의 풍광이 내 화면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내 방에서 보이는 섬이 있는데 그 존재 자체가 너무도 경이롭게 다가온다. 특히 반사돼 수면에 어리는 그 그림자가 아주 근사하다.
 
로베르토 길 드 몬테스. Photo by Bree Zucker. /Kurimanzutto
Encuentro, 2020, Oil on linen, 22.83x39.17x1.1in. /Kurimanzutto
 
─멕시코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0대에 가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오래 거주하지 않았나.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계기가 있나.
 
라 뻬니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10대 때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휴가 때면 라 뻬니따로 놀러 오기도 했고 수십 년 전쯤에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현대미술관(Museo de Arte Moderno)에서 일하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돌아오기도 했었다. 멕시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라 뻬니따는 내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마치 내가 원래부터 속한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고 그렇기에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작업 외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정원이 있어 이를 가꾸는 것을 즐긴다. 또 요리하거나 책 읽는 것도 소소한 기쁨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자유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 잘 모르겠다. 시간이란 내게 있어 비현실적이고 어디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많은 것을 이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이들, 또는 반대로 가진 것도 많고 장수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 말이다. 또 시간과 아울러 우주여행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아한다. 내 머릿속 생각에서만 존재하긴 하지만 가끔 우주여행을 떠나려는 노력도 해본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수많은 예술가를 따르고 존경한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저 나의 동료와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 친구들을 존경할 따름이다.
 
다가오는 9월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일 길 드 몬테스의 작품. Deer Parts, 2017, Oil on linen, 152.4x101.9cm. /Kurimanzutto
다가오는 9월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일 길 드 몬테스의 작품. Body Parts, 2017, Oil on linen, 99.1x78.7cm. /Kurimanzutto
 
─비엔날레는 11월 27일까지 이어진다. 그 외에 올해 계획은 무엇인가.
 
9월 프리즈 서울에 참가한다. 한국의 미술애호가들에게 내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0월에는 쿠리만주토 갤러리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다. 나는 전시를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다만 작업 자체가 내 삶이며, 나를 살아있게 하는 행위이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 결과물인 나의 그림들이 모여 전시가 되고 또 그 회화들은 각자 생명을 지닌다고 믿는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