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6.29 17:51
아시아 최초 개인전 ‘Life is Color’
10월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단순하고 쉬운 조형 언어와 다채롭고 이국적인 배색 조합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특유의 작업을 통해 디올, 프라다 등 럭셔리 패션계는 물론 뉴욕타임스, 롯데백화점, 일리 커피 등 업종 불문 러브콜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올림피아 자그놀리(Olimpia Zagnoli·38)가 한국을 찾았다.
자그놀리의 개인전 ‘Life is Color’가 아시아 최초로 10월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회고전 형태로 그녀의 작업 일대를 11개 섹션으로 나눠 타임라인별로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작가는 뉴욕타임스의 표지를 디자인하고 디올, 펜디, 프라다 등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국내에서는 롯데백화점과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와의 협업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보기만 해도 유쾌해지는 그의 작업의 원천은 바로 색(色). 세상의 모든 색채에서 영감을 받아 다양한 배색으로 남다른 시각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에 세계가 열광하는 이유다. 또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단순한 조형으로 무엇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데 있어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이번 전시 타이틀 ‘삶은 색깔이다’가 말해주듯이 그는 다채로운 색으로써 삶을 얘기하고, 또 삶을 이루는 여러 어젠다를 예술적 소재로써 아우르며, 팬데믹부터 LGBTQI+ 운동, 난민 구호, 여성 해방에 이르는 다수의 사회문제를 당차게 이야기한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자그놀리를 만났다. 작가는 유머러스하고 상대방을 웃게 만든다는 점에서 화면 속 자신의 캐릭터와 똑 닮아 있었다.



─한국은 첫 방문이라고 들었다. 서울에 대한 첫인상은.
유럽 내에서 며칠간의 짧은 여행은 종종 다녔지만, 대륙 간을 이동하는 큰 여행은 팬데믹 이후 처음이다. 오자마자 느낀 것은 서울은 참 젊고 활기찬 도시라는 점이다. 현재 밀라노에서 생활하며 작업 중인데, 서울과 밀라노 모두 국제적인 도시란 사실에서 공통분모를 지니지만, 이탈리아는 전통을 중시하고 느린 반면, 서울은 뭐든지 빠르고 생산적인 분위기인 것 같다. 또 전시장마다 젊은 관람객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인상적이더라. 두 나라 모두 음식을 좋아하고 음식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고 소통한다는 점도 비슷하다고 느낀다.

─서울에 영감을 받아 특별히 제작된 ‘Night in Seoul’이 이번 전시에 걸렸다. 서울의 밤을 즐겨본 소감은.
맛있는 저녁 식사와 ‘소맥’ 한잔하며 서울의 밤공기를 느껴본 정도다.(웃음) 로컬푸드야말로 그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던가. 그간 도시들은 내게 중요한 소재였는데, 이를테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보여주는 뉴욕시티 풍경은 내 대표작 중 하나다. 서울에서의 전시가 확정됐을 때에도 가장 먼저 한 일이 서울의 마천루를 인터넷에서 찾아본 것이었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빌딩을 발견했는데,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의 건축물이면서도 나의 조형 언어와 잘 들어맞는 각지며 대칭적인 모양의 ‘강남 교보타워’가 내 눈에 띄었다. 도심에서 흔히 보기 힘든 빨간 벽돌의 고층 건물이란 점도 재밌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서점이 입점해 있다는 것에 더욱 매료됐다. 서점이 주는 차분함과 특유의 분위기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밤 드디어 방문해본 강남 교보타워는 서울의 밤과 도시의 ‘소울(soul)’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삶은 색깔’이라고 말한다. 본인에게 컬러란 또 어떤 의미를 지니나.
작업은 물론, 나란 개인에게 있어서도 색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나는 여러 색의 조합에서 다양한 영감을 얻곤 한다. 실제로 작업할 때도 컬러를 택하고 조합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다. 작업 초기에는 튀는 색들을 쓰는 것이 다소 꺼려지기도 했었다. 안전하게 가기 위해 무채색이나 몇 가지의 원색만 종종 사용할 뿐이었다. 색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강렬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어 작품의 분위기를 좌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색이 주는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색은 나로 하여금 작가로서 또 여성으로서 더욱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듯하다.


─화면에서 다양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작업에 예술가로서의 삶과 내 자신을 투영해야 한다고 했을 때, 여성인 나를 직접적인 소재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자연스럽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를 ‘여성 작가’라는 틀에 가두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이란 비교적 유연한 형상을 조형 언어로써 활용하고 싶었다. 따라서 내 화면에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별을 꼭 구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여성의 구체적인 신체를 소재로 삼은 특정 작업들에 대해서는 의도적인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여성이 자기 신체에 대해 좀 더 편안함을 느끼고, ‘여자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여자는 저렇게 하면 안 된다’ 등과 같은 사회나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탈피해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를테면, 언급 자체가 터부시되곤 하는 여성의 성적 쾌락을 주제로 한 ‘Orgasm’(2018)에서는 이를 숨겨야 할 문제가 아닌, 여성의 신체 건강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전시의 아홉 번째 섹션인 ‘The Body Electric’에서는 여성의 몸을 캔버스 가득 채우는 식의 대범한 화면 구성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메시지를 큰 목소리로 전달하고자 함이다.
─팬데믹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 이번 전시에 출품됐다고 들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락다운 동안의 작업을 즐긴 편이었는데, 조용하고 차분하게 작업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일종의 휴가와도 같았다. ‘178 Hours in Isolation in Milan’(2020)은 뉴욕타임스 커미션 작품으로, 이탈리아 락다운 당시 발코니도 없이 창문 하나만 있는 작은 방안에만 머물러야 했던 스스로의 모습에 모티프를 얻어 제작됐다. 햇빛이 시간대별로 달리 비춰지는 모습과 그 빛을 따라 움직이는 나 자신을 8개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려냈다. 어두운 가운데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통해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이외에도 관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가장 좋아하는 작업을 하나만 꼽기는 어려운데 작품마다 고유의 특성과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눈여겨볼만 한 작업을 추천한다면, ‘The Kiss’라는 유화 페인팅 시리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신작이다. 지금껏 페인팅은 관객에게 선보인 적이 없었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내 작업에도 새로운 막이 열리게 될 것이란 예감이다. 6개의 시리즈가 각기 다른 컬러 조합으로 이뤄진 회화다.


─작품이 단순화된 조형을 지니지만 메시지만큼은 강력하게 전달하는 특성을 지녔다.
그렇다. 내 작업은 단순함에서 오는 개성과 유희가 크다. 간단하다고 해서 의미가 없다는 것은 선입견일 뿐이다. 관객에게 너무 많은 디테일과 정보를 주지 않으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 심플하면서도 메시지의 중심을 건드릴 수 있다면 보는 이는 자기만의 감상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해줄 것이다.
─작가로서의 자신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탄력 있는’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는 유연함을 지닌 그런 작가. 고무 밴드처럼 말이다.(웃음) 내 작업이, 그림이 어떠한 매체나 소재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고 발전될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럭셔리 패션 하우스와 협업하든 파스타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하든, 혹은 내 개인적인 작업이 됐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