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1.20 21:51
아트조선스페이스 개관 기념 특별전
‘하인두 오마주’ 회화 등… 2월 19일까지


33년 걸렸다. 1989년 작고한 하인두 화백이 딸 하태임 작가와 재회하기까지의 시간이다. 하인두·하태임 부녀가 작품을 한자리에 선보이는 최조의 전시 ‘잊다, 잇다, 있다’가 20일 서울 중구 아트조선스페이스(ART CHOSUN SPACE)에서 개막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단둘이 함께하는 전시는 하태임에게 있어 숙원이자 한 번쯤은 치러야 할 관문 같은 것이었다. 이날 오프닝 행사장에서 만난 작가는 한껏 상기된 모습이었다.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얼마나 부담스럽고 어깨가 무거웠던지요. 전시장에 아빠 작품과 제 그림이 나란히 걸린 것을 보니 아빠가 부쩍 더 생각이 납니다.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국내 미술시장에서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는 하태임과 부친 하인두가 작품으로서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최초의 만남으로 일컬어지며, 개막 전부터 기대를 모은 이번 전시는 2019년부터 기획에 착수했으나 팬데믹 등의 이유로 거듭 연기된 끝에 어렵사리 마련된 귀한 자리다. 전시 개막은 오후 3시부터 예정이었으나 이미 오전부터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며 문전성시였다.

이날 전시장을 찾은 60대 여성 관람객은 “부녀 작가가 흔치 않은데, 두 작가의 작품이 사이좋게 한 공간에 걸린 모습에 뭉클해진다”고 했으며, 평소 하태임 작가의 팬이라고 밝힌 40대 남성 관람객은 “두 작가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림을 비교하는 묘미가 쏠쏠하다”고 감상평을 전했다.


하태임은 양친(하인두·류민자 화백)의 영향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림을 업으로 삼게 됐지만, 동시에 부모의 이름이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애를 써왔다. 그 결과, 오늘날 그는 미술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동시대 미술애호가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인 컬러밴드 연작 ‘통로(Un Passage)’는 매끄럽게 바탕색을 칠한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곡면의 색띠를 여러 번 덧칠해 표현한 작품이다.

컬러에 따른 작가의 메시지와 감상이 담겨 있으며, 화폭을 채운 곡면의 색띠는 리듬감과 운율감을 선사한다. 하태임에게 컬러밴드는 보는 이와 교감하고 소통하는 통로인 셈이다. 한마디 말로는 똑떨어지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과 감상을 서로 다른 컬러밴드의 중첩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보는 이에게 쉽고 친근하게 다가간 것이 컬렉터들의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이번 전시는 한국 전통과 불교 사상을 기조로 한 비정형 추상화의 선구자 하인두(1930~1989)의 작업세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에도 목적이 있다. 하인두는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고 한국적인 추상미술을 선도하며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으나, 한창 작업에 매진할 나이에 작고한 탓에 같은 시기 활동했던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조명 받지 못했다.
한국 1세대 추상화가로서, 보수적이었던 한국 화단에 ‘색면 추상’이라는 새로운 동향을 불러온 주요한 인물인 만큼, 이번 전시에서는 오방색과 기하학적 패턴을 통해 형이상학적이며 불교적인 관념을 구현한 그의 대표작 다수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말년의 긴 투병 중에도 창작열을 불태우며 완성해낸 수작 ‘혼불’ 등이 내걸렸으며, 그의 색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드로잉도 볼 수 있다.


전시의 백미는 하태임 작가가 하인두 화백을 그리워하며 오마주한 신작 두 점이다. 컬러밴드가 수면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듯한 하태임의 기존 작업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화면으로, 하인두의 기하학 패턴을 재해석하려고 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작가의 회화 40여 점과 하인두의 드로잉 10여 점이 걸린 이번 전시는 2월 19일까지 월~토 10:00~18:00 운영되며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한다. (02)736-7833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