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따뜻한 힐링은 루이스 부르주아의 유칼립투스처럼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1.12.24 13:27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
1월 30일까지 국제갤러리

LEAVES (#4), 151.8x49.5cm, etching, gouache, watercolor, pencil, ink, colored pencil and fabric on paper, 2006 ©The Easton Foundation/VAGA at ARS, New York/SACK, Seoul /국제갤러리
 
시대를 불문하고 롱런하는 아이코닉한 셀럽을 두고 일컫는 ‘연예인의 연예인’이란 말이 있다면, 시대상을 누구보다도 민첩하게 반영하고 시대적 미감이 뛰어난 작가들이 입을 모아 꼽는 ‘작가의 작가’는 누구일까.
 
동시대미술가들이 가장 동경하고 영감을 많이 받는다는 작가 중 하나인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1911~2010)는 현대 미술사에 입지적 발자취를 남긴 프랑스 태생의 미국 작가다. 오늘날 주요 어젠다 중 하나인 페미니즘을 비롯해 모성, 섹슈얼리티, 자연 등 다채로운 모티프를 소재로 삼았던 그는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모마(MoMA)에서 회고전(1982)을 열었고 베네치아비엔날레(1999)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당대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뉴욕 웨스트 20번가의 자택 계단에서 내려오는 루이스 부르주아(1992)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VAGA at ARS, NY /국제갤러리
 
부르주아가 작가들을 아울러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유년 시절,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기인한 트라우마와 기억을 미술작업으로써 구조화하고 구현하는 과정이 직관적인 덕분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대중의 마음에도 쉽게 와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직접 목격한 아버지의 외도와 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긴 아버지의 태도에서 받은 충격과 상처, 그리고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부르주아의 생애에 걸쳐 다양한 형상과 매체로 표현됐다. 고통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창작의 밑거름으로 삼아 삶과 미술이 혼연일체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그의 작업 세계는 조각부터 드로잉, 설치, 바느질 작업까지 다양한 소재와 장르의 작업을 통해 시대적 특성이나 흐름으로 규정지을 수도, 한마디로 정의하기도 불가한 고유성을 드러낸다.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The Smell of Eucalyptus)’ 전경 /국제갤러리
 
다양한 재료를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기존 미술의 형태적, 개념적 한계는 물론 초현실주의와 모더니즘 등의 주류 미술사조를 초월하는 사적이고도 독창적인 언어를 끊임없이 연구, 구축한 부르주아. 그의 삶 그리고 작업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The Smell of Eucalyptus)’는 타이틀 그대로 작가의 삶에서 다층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유칼립투스를 소재로 한 작업이 내걸렸다. 부르주아의 후기 평면 작품들을 작가의 커리어 전반으로부터 선별한 조각 작품들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동일한 형식적, 주제적 고민을 다루는 다른 시대, 다른 매체의 작품군 간의 흥미로운 대화를 촉발한다.
 
TURNING INWARDS SET #4 (THE SMELL OF EUCALYPTUS (#1)), 149.9x87.3cm, etching on paper, 2006 ©The Easton Foundation/VAGA at ARS, New York/SACK, Seoul /국제갤러리
 
출품작의 제목이기도 한 ‘유칼립투스의 향기’는 부르주아의 후기 작품에서 특히 주요하게 조명되는 기억, 자연의 순환, 오감을 강조하는 문구다. 1920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에 거주하며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던 젊은 시절의 부르주아는 당시 유칼립투스를 약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로써 유칼립투스는 작가에게 있어 어머니와의 관계를 상징하게 됐고 특히나 작가의 노년기에 두드러지게 표면화된 모성 중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매개체로 기능했다.
 
유칼립투스는 작가의 추억 기제를 촉발하고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낼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이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의 방증인 것이다. 실제 그는 생전 스튜디오를 정화하고 환기하기 위해 유칼립투스를 태우곤 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삶 곳곳에서 실질적, 상징적으로 쓰인 유칼립투스는 부르주아에게 미술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The Smell of Eucalyptus)’ 전경 /국제갤러리
 
총 출품작수 54점 중 39점이 한 세트로 구성돼 전시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내면으로 #4(Turning Inwards Set #4)> 연작은 부르주아가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 작업한 판화와 종이 작품이다. 소프트그라운드 에칭(soft-ground etching) 기법으로 작업된 이 연작은 조각가로 잘 알려져 있는 부르주아의 판화가로서의 면모를 발견하게끔 한다. 바늘로 드로잉하고 새기는 행위가 흡사 날카로운 도구로 절단하고 새기는 조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함께 상기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The Smell of Eucalyptus)’ 전경 /국제갤러리
 
특히 기하학적 모양이 눈길을 끄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자신의 고통을 형상화하기 좋은 형태”라고 설명한 바 있다. 나선형의 소용돌이 모양도 눈에 띄는데, 혼돈 속에서도 자유와 해방을 이끌어 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이외에도 작가가 해당 시기에 몰두했던 도상, 즉 낙엽이나 식물을 연상하는 상승 곡선, 씨앗 혹은 꼬투리 형상의 기이한 성장 모습, 다수의 눈을 달고 있는 인물 형상, 힘차게 똬리를 틀고 있는 신체 장기 등 작가의 조각 작품을 참조하는 추상과 반추상 모티프를 더욱더 심도 있게 감상할 수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The Smell of Eucalyptus)’ 전경 /국제갤러리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The Smell of Eucalyptus)’ 전경 /국제갤러리
 
<내면으로 #4> 연작은 부르주아의 후반 형식 및 주제 실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 이후 제작한 <잎사귀 (#4)(Leaves (#4))> <너울(Swaying)> <통로들 (#3)(Passages (#3))> <높이, 그리고 더 높이(Up and Up)> 등 동일한 원판을 기반으로 손수 칠해 만든 대형 판화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지속적으로 개발해나간 도상학적 어휘록을 설정했다. 부르주아는 일기 등 자신의 글에서 발췌한 텍스트 파편들을 이 작업들에 녹여냈다. 
 
내면에 조용히 귀 기울임과 동시에 현실과의 간극을 역동적으로 오가며 부르주아는 보는 이에게 의미 있는 파동을 선사한다. 추운 계절, 몸과 마음을 온화하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유칼립투스의 향기’로 힐링해보자. 내년 1월 30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TURNING INWARDS SET #4 (SWELLING), 152.1x92.7cm(left), 152.4x93.1cm, etching on paper, diptych, 2007 ©The Easton Foundation/VAGA at ARS, New York/SACK, Seoul /국제갤러리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