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8.06 19:37
‘내가 본(本) 김태호, Balance’展
시각, 후각, 청각으로 감상하는 대표작 ‘내재율’
9월 26일까지 파주 스튜디오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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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단색의 단조로운 평면으로만 보일 수 있으나, 화면 앞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앞선 성급한 판단에 자못 무색해진다. 수많은 색이 층층이 쌓여 합주하듯 빚어낸 입체적이고도 다층적인 하모니가 캔버스 위로 펼쳐진다. 화면을 종횡하는 수평과 수직의 조화로운 운율은 수십 겹 쌓아 올린 색층이 굳으면 그 표면을 칼로 깎고 긁어내기를 거듭하며 완성해낸 것이다. 물감층 안쪽 깊숙이 숨은 레이어의 속살이 드러나며 겉에서는 짐작할 수 없었던 묘한 빛깔과 컬러가 그제야 드러나게 된다. 김태호(73)의 작업을 두고 단순한 평면 작업이 아닌, 입체 조각을 연상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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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의 대표작 <내재율(Internal Rhythm)>은 캔버스에 그려진 수직과 수평의 격자 문양을 바탕으로 삼아 캔버스를 90도로 계속 돌려가며 스무 번 이상 색을 올리는 행위성의 완성체다. 화면의 층을 조각하듯 깎아내고 속내를 드러냄으로써 촉각적 특성을 극대화한다. 이에 대해 안현정 미술 평론가는 “수직과 수평을 이룬 물감의 계획성은 특수 제작된 칼로 깎이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내적인 동시에 외적인 리듬은 작가의 ‘숭고한 노동’을 외재율과 내재율의 하모니즘으로 전환한다”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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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개인전 ‘내가 본(本) 김태호, Balance’가 9월 26일까지 경기 파주 문발동 스튜디오 끼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가 최초로 시도한 원형 캔버스 작업 등을 비롯해 30여 점의 작품이 공개된다. 150평 규모의 스튜디오 끼 전시장의 대대적인 리뉴얼 후, 처음 여는 전시이기도 하다. 최대 8m 층고의 탁 트인 전시장에는 100호부터 300호에 이르는 대작이 다수 내걸렸다.
이광기 스튜디오 끼 대표는 이번 전시를 기획하며 시각은 물론 후각과 청각까지 섬세하게 자극하도록 꾸리는 데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진다.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온몸을 휘감는 은은한 향에 먼저 매료되는데, 이는 조향 컨설턴트 사라배 센트바이 대표와 김필근 조향사가 김태호의 작품을 연구 후 제작한 향 ‘내재율 그레이(Internal Rhythm Gray)’다. 작가의 작품과 잘 어울리는 우아하고도 기품 있는 향으로, 디퓨저와 캔들로 출시돼 집안 곳곳에 활용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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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내재율 캔들은 겉으론 일반 양초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불을 붙여 촛농이 녹아 흐를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이름 그대로 양초 속에 ‘내재’돼 있던 오색의 초가 녹아 밖으로 흘러넘치며 쌓여 그야말로 또 다른 ‘내재율’을 빚어내 초가 녹을수록 드러나는 색 촛농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캔들 하나만으로도 오브제와 같은 아트 피스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 눈길을 끄는 상품이다. 이외에도 4호 크기의 판화 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아트굿즈가 전시장에서 판매된다.
매혹적인 향기 다음으로 관객의 감각을 깨우는 것은 감미로운 선율. 작품 앞을 거닐다 보면 전시장을 조용히 가득 메우는 음악을 인지하게 되는데, 작가의 홍대 후배이자 흥행 드라마 ‘다모’ ‘킬미, 힐미’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등의 OST를 작곡한 김수한 음악감독이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선곡한 플레이 리스트다. 김 음악감독이 김태호 작가의 <내재율>을 모티브로 해 작품을 더욱 심도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어울리는 음악을 페어링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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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작품 외에도 즐길 거리가 요소요소 있는 이번 전시에서는 박서보, 하종현, 하태임 등 미술계 선후배가 말하는 김태호의 면면을 영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김태호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그의 스승 박서보, 하종현 두 화백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추상화의 계보를 잇는 김태호의 교량적 역할을 되짚어볼 기회다. 17세 시작된 박 화백과의 만남, 홍대 미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져 오고 있는 하 화백과의 일화 등을 들을 수 있다.
“김태호도 이젠 좀 늙었다. 머리도 허옇고… 어렸을 때 참 예뻤는데. 지금도 동안이지만, 어릴 땐 말귀도 잘 알아듣고 재주도 뛰어났던 학생이었다.”(박서보)
“사람이 나긋하고 싫은 소리 한번 없이 심부름과 일을 잘했다. 내가 같이 일하기 좋았던 학생이었고, 교내에 연구소가 없어서 신촌시장에 작은 방을 얻어서 그림을 그렸는데, 전임이 돼서 그 연구소를 김태호가 인수받게 됐다.”(하종현)
“김태호 선생님은 완벽주의자다. 고집스럽고 딱딱한 느낌의 완벽주의자가 아닌 따스하면서도 유쾌한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시는 스승이자, 작가들의 본보기가 되신다.”(하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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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란스(Balance)'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은 고른 상태를 뜻한다. 사제 관계는 물론, 이념적으로나, 색채와 조형 사이에서도 편향되지 않은 채 유지해온 어진 균형 감각은 김태호의 작업 세계에서의 핵심 철학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 타이틀이 왜 발란스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031)8071-8822
◆스튜디오 끼: 경기 파주시 회동길 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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