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7.23 17:58
세기의 기증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 한국 명작 58점 공개
내년 3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초현실적인 하늘빛의 사슴이 속세를 초연한 듯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우아하게 혹은 의기양양한 기세로 당당히 서 있다. 따뜻하고 차분한 파스텔톤의 색면들 위에는 양식화된 인물, 사물, 동물 따위가 원근감 없이 콜라주 형식으로 툭툭 배열돼 고답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폭 6미터에 달하는 그림의 초대형 스케일에 낭만적이고도 환상적인 느낌은 더욱 배가된다.
이른바 ‘2000호’란 별칭으로 불리며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은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가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展)에 걸렸다. 이번 특별전을 전담한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김환기 작품으로 이만한 크기는 처음 봤다. 그림의 한쪽 귀퉁이 가격만 따져도 수십억원일 텐데, 그야말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1950년대 조선방직을 인수해 당시 국내 최대 방직재벌이었던 삼호그룹 정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자택을 신축하면서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 제작한 작품으로, 단순화된 나무, 백자나 청자를 머리 위에 이거나 안은 반라의 여인, 항아리와 학, 사슴, 쪼그리고 앉은 노점상과 꽃장수의 수레, 새장에 이르기까지 김환기가 즐겨 차용하던 단골 소재가 총망라돼 있다.
스스로를 ‘항아리 귀신’이라고 부를 만큼 항아리를 사 모았던 김환기였지만, 전쟁이 끝난 뒤 집에 돌아와 박살 나 있는 항아리와 백자들을 보고는 충격에 더는 이를 사 모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항아리를 향한 애정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혹자가 김환기에게 ‘그림이 항아리 같다’라고 말해 그가 뜨끔해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항아리를 흠모하던 김환기의 면모는 <여인들과 항아리>의 화면 곳곳에서 드러난다. 비대칭의 자연스러운 선과 투박한 색면 처리는 조선 백자의 형식미를 사모했던 이 시기 김환기 작품의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전쟁과 피난의 현실을 은유했던 노점상이나 인물들은 판잣집, 천막촌 대신 조선 궁궐 건축물과 함께 배열하고, 물을 긷고 고기를 잡아오는 노동현장의 여성들은 고운 천의 옷을 걸친 여성으로 변모시켜 풍요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꽃수레, 그중에서도 수레바퀴가 유럽적 도상으로 보여 김환기가 ‘파리 시기(19556~1959)’를 지내고 온 뒤 1959년 즈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은 1960년대말 삼호그룹이 쇠락하면서 미술시장에 나와 이후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 2022년 3월 13일까지 서울관에서 열린다. 이건희 회장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컬렉션은 미술사적 가치는 물론 규모에서도 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록이다. 김환기를 비롯해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유영국, 변관식, 이응노, 권진규 등 한국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돼 이를 보기 위한 국민의 관심이 그야말로 엄청나다. 예약 관람으로 운영되는 이번 전시는 현재 예약 가능한 8월 초 일정까지는 매진됐다.

근현대미술사를 아우르며 20세기 초 희귀하고 주요한 국내 작품에서부터 해외 작품까지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보강시켰다. 기증작 전체 1488점 중 한국 작가 작품 1369점, 해외 작가 작품 119점으로 구성돼 있다. 부문별로는 회화 412점,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사진·영상 8점 등으로 고루 분포돼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 34명의 주요 작품 58점을 먼저 선보인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주축으로 크게 세 개의 주제로 나눠 꾸려졌다.
첫 번째는 수용과 변화다. 일제 강점기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면서 미술계도 변화를 맞이한다. 서구 매체인 유화가 등장하였고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 생경한 용어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조선의 전통 서화도 변화를 모색한다. 백남순의 <낙원>(1936년경), 이상범의 <무릉도원>(1922)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이 시기 동서양 회화의 특징이 융합과 수용을 통해 변모하는 과정을 비교, 감상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개성의 발현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격동의 시기에도 작가들은 작업을 멈추지 않고 전시를 열고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며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김환기, 유영국, 박수근, 이중섭 등 작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들의 독창적인 작품은 한국미술의 근간이 된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 이중섭의 <황소>(1950년대),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등 이건희컬렉션에는 특히 이 시기의 작품이 집약돼 있다.

마지막은 정착과 모색이다. 전후 복구 시기에 작가들은 국내‧외에서 차츰 정착하며 꾸준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모색한다. 이성자, 남관, 이응노, 권옥연, 김흥수, 문신, 박생광, 천경자 등이 고유한 조형세계를 구축하며 한국미술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었다. 이성자의 <천 년의 고가>(1961), 김흥수의 <한국의 여인들>(1959) 등 이 시기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