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자극하는 스토리텔러 ‘라이언 갠더’ 개인전

  • 아트조선 박윤나 에디터

입력 : 2021.07.20 17:31

9월 17일까지 '스페이스K'서 개최
'시간성’ 주목한 신작 포함 28점 전시

Ryan Gander, Letter to a young artist, 2019-2020, Discarded letter, 22 x 17.6cm / 스페이스K
영국의 개념 미술가 라이언 갠더 (Ryan Gander) 개인전 ‘변화율(The Rates of Change)’에서는 일상적인 사물을 단서로  예기치 못한 스토리텔링을 유도하는 설치와 조각, 평면, 사진, 텍스트까지 다양한 매체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갠더의 예술관은 이 세상이 관습적 기호 (conventional sign)와 자연적 기호 (natural sign)로 구성돼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작’ 아닌 ‘발견’된 물건들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그는 일상의 물건을 마치 예술품처럼 관조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놀랍도록 기호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지 환기시킨다. 권위를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소통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관습적 기호와 우연적으로 소통하는 자연적 기호 사이에 그의 작품이 위치한다. 작가는 그저 단서와 힌트를 제공할 뿐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Ryan Gander, The End, animatronics, 2020, mouse, audio, 19.5 x 24 x 22 cm / 스페이스K

일상 생활 속 평범한 사물들에 새로운 경험을 부여하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우연의 에이전트 (Agent of Happenstance)>와 <연결의 에이전트 (Agent of Connectivity)>는 홀로그램으로 가상 구현된 달걀과 전화기를 직접 잡아보도록 유도하는데, 이 같은 행위를 통해 관람객들은 평범한 사물에 대한 인식 전환을 맞게 된다. <모든 종류의 0보다 257도 낮은 온도 (Two hundred and fifty seven degrees below every kind of zero)>는 전시장 천장에 실물 크기 헬륨 풍선을 띄운 것처럼 보이지만 고광택 유리 섬유로 만들어져 있으며,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재현한 <움직이는 오브제, 또는 의도 (A Moving Object, or Intent)> 또한 사실은 견고한 청동에 채색한 조각이다. 한편 구겨진 편지를 전시장 바닥에 연출한 <젊은 작가에게 (Letter to a young artist)>는 여덟 살 시절의 자신을 젊은 예술가로 상정하여 써 내려간 편지를 관람객과 공유한다.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실감을 주제로 한 이 작품들처럼 현실을 벗어나 상상의 영역으로 관람객을 이끌기 위해 갠더는 우연과 사고의 속성을 유머와 위트에 결합한다. 아울러 풍자적인 면모도 엿보이는데, <난 다시는 뉴욕에 가지 않을거야 (I'm never coming back to New York again)>에서는 쥐가 파먹은 듯한 갤러리 벽의 구멍에 20파운드짜리 지폐를 구겨 넣어 미술계에 만연한 엘리트주의와 속물주의를 비판한다.

전시 제목 ‘변화율 (The Rates of Change)’은 작품에 시간적 속성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예컨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시간의 흐름을 정량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로서 ‘쌓인 눈’을 이용한다. <몇 인치의 눈이 쌓인, 뒤집힌 브로이어 의자 (Up ended Breuer chair after several inches of snowfall)>와 <눈 내린 오후 뒤집힌 르 코르뷔지에 의자 (Up turned Le Corbusier chair following an afternoon of snowfall)>에는 디자인사에 남다른 의미를 갖는 유명 의자를 등장시켜 그 위에 쌓인 눈을 연출한다. 넘어진 의자는 넘어지기 이전 혹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대한 상상을 유발한다. 이렇게 이야기꾼으로서 갠더의 재주는 고양이와 좌대가 등장하는 일련의 작품에서도 발휘된다. 살아 숨쉬는 듯한 고양이와 흰색 좌대가 작품의 전부이다. 작가는 본래 다른 작품이 놓였던 좌대 위에 기계 모형 고양이를 배치하고 모든 좌대의 출처와 고양이 이름을 작품의 제목에서 서술형으로 길게 풀어냈다. 길고양이 로티와 타이거, 삭스, 스모키가 각각 에바 헤세 (Eva Hesse)와 수잔 힐러 (Susan Hiller), 브루스 맥클린 (Bruce McLean), 조나단 몽크 (Jonathan Monk)와 같은 현대의 주요 조각가의 논쟁적인 작품들이 놓였던 좌대를 하나씩 차지하는 유머러스한 풍경이 펼쳐진다.
Ryan Gander, Up ended Breuer chair after several inches of snowfall, Wassily Model B3 chair, 2016 marble resin, 80 x 86 x 73.5cm/스페이스K

특히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스페이스K 서울 전시장의 루프탑에 설치되는 <우리의 긴 점선 (또는 37년 전) (Our Long Dotted Line (or 37 years previous))>이다. 자갈에 채워진 손목 시계 모양을 한 이 검정색 콘크리트 조각은 마치 거인이 남겨 두기라도 한 듯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확대되어 있다. 일생을 자동차 공장 엔지니어로 일한 작가의 아버지가 은퇴 기념으로 회사에서 받은 시계와 집 근처 해변에서 발견한 자갈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자신의 시간을 돈으로 교환한 아버지가 이제는 자본주의적 체제에 의해 시간을 되돌려 받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출근 기록부 대신 소유하게 된 시계는 아버지에게 자유의 기호로 작동한다. 하지만 조각으로 만들어진 시계는 작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작동하지 않을 때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이 유발된다. 시계라는 기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작품 속에서 엄청난 크기로 확대되어 시간의 무게와 중요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동안 구상한 기호 시리즈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소통 시스템으로서 회화에 접근한 이 신작에서 갠더는 한국, 아랍, 일본, 로마 글자가 결합된 특수한 언어를 추상적 문양처럼 제시하여 관습적 기호가 아니라 자연적 기호로서의 회화를 실험한다.
갠더는 “관람객이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직접 알려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한 이야기의 ‘서두’가 되며 그 후 이어질 이야기는 언제나 관람객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도록 남겨진다. 기호와 관습은 물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이번 라이언 갠더의 개인전에서 낡은 인식과 진부한 맥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와 암스테르담에서 인터랙티브 미술과 순수 미술을 전공한 라이언 갠더(b.1976)는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이듬해 카셀도큐멘타에서 잇단 주목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여러 매체를 넘나들며 시각적 형식과 내용을 다채롭게 선보여온 그는 오늘날 개념 미술을 주도하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다. 퐁피두 센터와 테이트 미술관을 비롯해 뉴욕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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