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나 빛으로 완성되다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1.06.29 00:17

[김지아나]
“흙은 생명… 그래서 살아있는 작품하고 싶어”
詩와 같이 보는 이의 심상을 비추는 작업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붉은 조명이 핏빛처럼 음산히 번지는 좁고 기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천장에서부터 눈높이까지 내려온 알 수 없는 기괴한 작은 형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한눈 팔리기도 잠시, 생각보다 꽤나 가파른 계단에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고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이 한없이 깊은 계단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 우리가 코로나19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그것과 같지 않을까요? 까딱하면 꼭 추락할 것만 같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친구나 연인 사이의 관람객도 이 계단을 내려갈 때만큼은 자연스럽게 서로 거리두기를 하며 한 걸음씩 주의하며 내려가게 되죠.”
 
‘COVIDUS-일그러진 지구’(2021) ⓒ김지아나
 
김지아나(49)의 <COVIDUS-기울어진 계단>(2021)과 <COVIDUS-일그러진 지구>(2021)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재난과 치유’에 걸렸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지구적인 재난 상황을 예술가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전시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으로 확산되는 바이러스와 팬데믹을 계기로 더욱 촘촘히 연결되는 소셜미디어의 밀집 현상을 설치 작업으로 구현했다. 
 
작가는 우리네 삶과 사회현상, 인간의 감정 등 무수한 동시대 이야기를 포슬린 조각으로 고안해낸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풀어내 왔다. 그는 크기별로 나눈 도자 조각과 가루를 접착제를 바른 캔버스 위에 일일이 손으로 꽃아 가며 화면을 완성해낸다. 표면에 수없이 꽂힌 크고 작은 포슬린 조각은 강하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그 속성은 실로 섬세하고 가녀린 이중성을 지닌다. 마치 힘든 오늘을 기꺼이 견뎌낸 우리에게도 강인함과 연약함이 공존하듯 말이다. “고온의 불을 만나 오랜 시간 버텨낸, 수없이 많은 작은 포슬린 조각들은 다시 제 화면 위에 한데 모여 시공간을 이루고 사회를 이룹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8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재난과 치유’에 작품 두 점이 출품됐다. 본래는 바이러스와 전혀 무관한, 아름다운 형상인데, 전시장에서 보니 지금과는 색다른 분위기가 이채롭더라.
 
“계단에 설치된 작품 <COVIDUS-기울어진 계단>을 보며 내려가면 이어지는 전시장에서 곧바로 <COVIDUS-일그러진 지구>를 볼 수 있다. 계단은 두 작품을 잇는 매개와도 같은 역할이자, 또 전시장 밖으로 나오려면 그 계단을 다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흡사 코로나19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세상의 앞날은 여전히 미정이다. 그렇다고 코로나19를 떼어놓고는 우리 일상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좋든 싫든 우리 삶의 일부인 셈이다. 
 
팬데믹을 관통하며 새롭게 생겨난 ‘거리두기’라는 말은 곧 코로나19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두지만,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세상은 오히려 더욱 가까워진 듯하다. 오브제들이 마구 얼키설키 뒤얽힌 모양의 <COVIDUS-일그러진 지구>는 소셜미디어를 형상화한 것일 수도, 코로나19가 우리의 삶에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엉켜있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위의 두 작품을 비롯한 설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이 있다. ‘재난과 치유’에서는 주제가 주제인 만큼 꼭 바이러스처럼 보인다는 의견도 있더라. 일견 그릇 같기도, 깨진 알 같기도,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한순간을 포착한 것 같기도 한 이 형상이 본래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흘러가는데, 그 시간을 잡아 담아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실제 시간의 한 순간을 포착한 형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양이 마치 밥공기 같기도 하고,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역동적인 일순처럼 보이는 것이다. 참 흥미로운 지점은 이들 오브제의 모양이 모두 일정하지 않다는 거다. 몰드를 떠서 가마에 굽는 건데, 구워지며 각 흙의 성질에 따라 온도에 따라 모양이 제각각으로 나온다. 마치 인간이 모두 엄마에게서 나오지만 절대 같은 사람이 없고 서로 다른 것처럼, 도자 또한 불이란 자연환경에 의해 각자 개성 있는 모양으로 구워진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그렇다면 애초에 흙을 소재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대학 시절 흙을 처음 접했다. 메탈, 유리 등 별별 재료와 부대껴봤지만 그중에서도 흙이 제일 좋았다. 어렸을 때 흙놀이하며 놀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흙에서 도리어 내가 힘을 얻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자유로운 흙의 속성에 빠졌다고나 할까.
 
그러나 마냥 쉬운 재료는 아니다. 처음에는 흙과 많이 싸웠다. 만들고 싶은 모양을 잡아 가마에 넣으면 흙이 자꾸만 자빠지고 쓰러지더라. 마음처럼 되지 않아 흙에게 역정을 내보기도, 하소연해보기도 했다. 언제인가는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심정으로 작업실에 일주일을 틀어박혀 흙을 굽고 또 구웠던 때가 있었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던 때 문득 깨달았다. 흙을 너무도 사랑해서 흙으로 작업한다던 내가 흙을 이리도 구속하려고 했나 싶더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말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한결 마음이 후련해지며 그 이후부터 작업이 쉽게 풀렸다. 
 
흙으로 평면적 이미지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흙을 접하면서부터 하기 시작했다. 도예가와는 흙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다르다. 나는 흙으로써 투광성을 끌어내 얇게 이미지화하는 성질을 활용한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보는 각도에 따라 꽃잎처럼, 물결처럼 때론 산맥처럼 보인다. 자연의 생명력과 생동감을 재현하고자 한 것인가.
 
“어떤 특정 자연을 형상화하려고 하진 않지만 결국은 언제나 자연과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불로써 먼저 빚어지고 끝에는 빛으로 완성되며 자연과 합이 들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내 작업이다. 시(詩)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보는 이의 심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결말이 달라지는 것처럼.
 
크기별로 나눈 자기 조각과 가루를 접착제를 바른 캔버스 위에 일일이 손으로 꽃아 가며 작업한다. 평생 해왔어도 여전히 시간과 힘이 많이 소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수고로움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있다. 누가 봐도 시간과 노력이 깃든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작가의 응축된 에너지가 보는 이에게 전달될 수 있는 작품이 점점 더 귀해지는 세상 같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표면에 수없이 꽂힌 크고 작은 도자 조각은 날카로운 첫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그 속성은 실로 섬세하고 연약해 자칫 손끝을 대는 것만으로도 깨질 것 같기도 한데.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조각이나 부스러기가 떨어질 수 있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내가 일부러 의도한 부분이기도 하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생명 아니던가. 단순히 보존성만을 높이기 위해서는 플라스틱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를 두고 과연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흙에는 본디 생명과 소멸의 의미가 공존하잖나. 그래서인지 자기마다는 꼭 사람처럼 각자의 개성이 있다. 절대 같은 자기는 존재할 수 없다. 빚을 때마다, 구울 때마다 다 다르다. 그래서 나는 흙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평면 작업이지만, 단조로운 평면성을 벗어나 강렬한 입체적 변주와 굴곡이 도드라지는 특성을 지닌다. 이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빛. 작업과 빛의 상관성을 설명한다면. 
 
“빛은 나의 평생 화두다. 내게 있어 작업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스위치 같은 존재랄까. 초창기에는 감광지를 활용한 작업을 했는데, 자연의 빛을 온전히 담아 빛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후에는 LED를 활용한 설치 작업에 몰두했었다. LED가 막 보급되던 때로, 빛으로 디자인한다는 의도로 색의 움직임을 주제로 삼아 작업했다. 지금도 여전히 빛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주재료다. 흙과 마찬가지로 빛을 구속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화면을 비추면 그날의 날씨에 따라, 보는 이의 기분에 따라 다른 느낌을 자아내도록 말이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