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5.07 18:24
원시주의에서 기인한 본능적 작품 세계
개인전 ‘WHITE BLACK RED +’, 30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
10여 년 실험 끝에 완성한 스티커 신작 ‘비틀’,
노랑, 보라 등 정제된 컬러 포인트 신작 등 5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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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울가(65)는 문명 이전의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를 화면을 통해 오늘날 대신 읊는다. 그의 화면에는 어항, 강아지, 술병, 꽃과 같이 일상적 삶과 관련된 요소들이 화폭에 가득하다. 이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시대에는 인간과 사물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무게감을 지녀 각자의 언어적 역할을 수행했을 거라고 작가의 믿음에서 비롯됐다.
그는 초기 인류가 동굴벽화에 남긴 본능적 표현과 유사하게 강렬한 색상과 리드미컬한 선들을 통해 무의식 세계의 에너지를 화면 위에 발현하고자 했다. 과감하게 드로잉한 듯한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이미지가 얽히고설키며 관계성 없는 다양한 사물이 무질서하게 종횡한다. 프리미티프와 샤머니즘에 대한 질문은 최울가의 지난 40년 화업의 동인으로,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 표현에 목말라 했던 최울가가 샤머니즘적 원시성을 색면화하는 작업에 천착하게 된 이유다. 화면에 등장하는 수많은 조형 요소는 모두 작가의 예술적 본능의 산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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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인십색 군상이 엉켜 돌아가는 하나의 세상사와도 같은 그의 그림 속에 똑같은 조형은 없다. 서로 다른 오브제는 각자 개성을 지닌 독립체로 존재한다.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형상과 암호 같은 기호와 문자, 단계적인 질서 없이 배치된 형상을 통한 비언어적 방법론으로 최울가는 인류의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각기 다른 성격을 개, 여우, 하이에나, 늑대 네 동물에 빗대는 식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 이익을 위해 편향을 일삼는 삶, 부조리한 사회를 동물 캐릭터로써 묘사한다.
대표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에서는 검은색과 흰색은 우주와 빛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색이라는 점에서 사용된다. 다양한 색상에서 생명의 기운을 찾고자 한다는 그는 이 두 가지 색을 사용하여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해왔다. 최근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 ‘레드’ 시리즈에서도 원시주의를 향한 최울가의 예술적 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동굴 벽면에 붉은색을 칠했던 초기의 인류처럼 작가는 강렬한 붉은색을 통해 삶과 죽음을 향한 비언어적 욕망과 원초적 감정을 투영한다. 빨간색은 황토로 만들어져 동굴벽화에 사용된 최초의 색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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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블랙, 레드 시리즈 신작을 비롯해 지난해 새롭게 시작한 컬러 포인트 시리즈 역시 눈여겨봄 직하다. 기존 평면 작품과 비교했을 때 한결 정제된 색과 화면구성이 특징적으로, 이는 무엇보다 작가가 2014년부터 연구하고 근작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중저색’의 영향이다. 최울가는 오방색이라 부르는 강렬한 원색의 주변으로 다양한 중저색을 칠해 조화롭게 자리한 화면 위로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순환시킨다. 최근 그는 더 나아가 기존의 제한된 사각형 캔버스에서 벗어나 더욱 다양한 매체와 형태의 작업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는 시도와 도전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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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새로움을 향한 지난한 모색 끝에 최근 첫선을 보인 ‘비틀(Beetle)’ 시리즈는 그의 도전정신의 결실이다. 최울가 고유의 유희적인 특징과 평면작업에서 작가의 무의식을 통해 탄생한 조형요소들, 틀에서 벗어난 유기적인 형상을 탄생시키고 싶은 작가의 열망이 담긴 신작이다. 그리는 것을 넘어 만드는 행위에 집중하며 보다 현대적인 표현방법을 꾸준히 모색한 결과물로, 레진과 에폭시를 혼합해 적정한 배합과 재료의 물성을 연구, 실험하는 데에만 10여 년이 걸렸다. ‘붙이기’에 수반되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물질성과 촉각성을 전달한다. 이전 회화 작업에서도 종종 둥근 스티커를 배경에 부착해 화면구성에 변화를 주곤 했는데, 이번 ‘비틀’ 시리즈는 어린아이가 스티커를 벽면에 붙이고 노는 것을 연상하듯 ‘최울가표 수제 스티커’로 전면을 일일이 채워 아기자기하고 유머러스한 면모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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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울가 개인전 ‘WHITE BLACK RED +’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7일 개막했다. ‘완판 작가’라는 별명에 걸맞게 출품작 50여 점 중 상당수가 정식 개막 전인 프리뷰 오픈 중 이미 판매됐다. 이번 전시는 흰색, 검은색, 붉은색을 배경으로 한 회화 신작을 포함해, 유화와 오브제, 입체조각의 범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실험적인 작업까지 한데 만날 수 있는 귀한 자리다.
한편, 기하학적인 기호와 상징을 이용한 독특한 화면 구성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로 뉴욕 화단의 주목을 받은 최울가는 국내는 물론 뉴욕, 파리, 베를린, 부다페스트 등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그의 작업은 지난 몇십 년간 형식적 독창성과 내용적 보편성을 함께 전달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확장돼 왔다.
그는 파리국립장식예술학교를 수료하고 베르사유 시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2000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작가는 그곳에서 그라피티(graffiti)의 자유분방함과 현대예술가 데미안 허스트 개인전에서 본 실험적인 설치미술에서 자극을 받아 이전의 작업들을 모조리 불태우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후 그는 오랜 시간 원시적이며 비언어적인 이미지만으로 이뤄지는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현재의 즉흥적인 화풍을 완성했다.
이번 전시는 이달 3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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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