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3.26 19:58
80년대 뉴욕 어두운 이면, 위트 있게 그려내…
한국서 첫 갤러리 개인전 ‘Cracked Window'
4월 24일까지 리안갤러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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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칼이 꽂혀있고 목에선 피가 솟구쳐도 귀엽다. 그로테스크하지만 유머러스하다. 음울한 이미지이지만 공포스럽기보다는 만화적이고 해학적인 면이 강렬하게 드러나 때론 깜찍하기까지 하다.
릭 프롤(Rick Prol·63)은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 등과 함께 교류, 활동하며 당시 특유의 감성을 탁월하게 반영한 작가다. 바스키아와 해링은 세상을 떠났지만 프롤의 독특한 회화는 여전히 그때의 감수성을 재현한다. 1980년대 뉴욕이라는 화려한 대도시의 이면에 도사리던 위험하고 어두운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내는데, 대범하고 강렬한 색상과 더불어 괴기스러운 인물과 행위 그리고 깨진 유리, 부서진 창문틀 따위의 소재를 통해 양가적인 이미지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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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업은 1980년대 뉴욕, 그중에서도 이스트 빌리지에서 태동했다. 당시 이스트 빌리지는 그야말로 우범지대였는데, 높은 실직률과 범죄율로 불탄 건물이 즐비했고 마약쟁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참혹한 환경에서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등장했고 그 무리에는 프롤을 비롯한 바스키아, 해링 등이 있었던 것.
프롤은 화려한 도시의 참혹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담아내고자 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놓치지 않았다. 도시 생활의 고통을 만화같이 표현해 재치 있게 그려냈다. 파운드 오브제, 즉 창틀이나 깨진 유리창 등을 활용해 도시 속의 황폐한 삶을 묘사했다. 버려진 재료를 작품 그 자체로 활용하기도 했다. 비록 현실은 어둡고 잔혹했을지 몰라도 프롤은 이를 활기차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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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프롤의 한국에서의 첫 갤러리 개인전 ‘Cracked Window’이 4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열린다. 작가는 바스키아의 오랜 친구이면서 마지막 어시스턴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둘은 1982년 처음 만났고 바스키아의 갑작스러운 죽음 직전까지도 프롤은 그의 전시 준비를 도왔다고 전해진다.
전시장에는 1980년대 뉴욕의 비참한 이면을 가감 없이 담아낸 독특한 회화 14점이 내걸렸다.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는 “개인적으로 바스키아의 팬이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어느 곳에 놔둬도 어울리고 빛이 난다. 프롤의 작품도 그렇다. 어떤 공간에 걸어놔도 현대적으로 녹아드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어 “작가가 이번 전시를 앞두고 방한 의지가 아주 강했다. 격리를 하더라도 꼭 오고 싶어 했으나, 아무래도 코로나19로 조심스러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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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당시 뉴욕에서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최동열 작가의 주선으로 기획됐다. 최 씨는 몇 년 전부터 이스트 빌리지 작가들을 국내에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덕분에 이스트 빌리지의 작가 친구들이 자신을 ‘동양의 홍보대사’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웃으며 당시를 회고했다.
“세계 각국의 작가들이 뉴욕 이스트 빌리지로 모여들던 때였다. 이들 대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열정적으로 예술에 빠지면서 자기관리가 서툴렀기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일찍 등진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혼만큼은 너무도 순수하고 어린아이와도 같았던 기억이다. 그중에서도 릭은 이스트 빌리지 아티스트군의 제3의 물결의 기수라고 할 수 있다. 이스트 빌리지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는데, 건물은 불타 있거나 비어있어 우범지대였고 그곳은 마약쟁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릭이 작품에 창문이 자주 활용하게 된 건 버려진 건물이 많다보니 창문을 재료로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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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장을 들어서면 관람객을 맞이하는 높이 2미터가 넘는 대작 <Bandage>(1982~1983)에는 목이 잘린 채 손에 붕대를 감은 인물과 그 주변으로는 깨진 병이 등장한다. 이는 1980년대 초반의 전형적 이미지로 분노, 폭력, 고통을 직접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예술가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의 절단된 손의 자화상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속 주인공은 프롤의 자신이지만 그가 무엇에 대항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열린 결말로 제시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다. 애매모호함과 잠재적인 수수께끼를 남겨둬 보는 이에게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Saint Agony>(1983)에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입에 칼을 꽂고 환각을 느끼며 고뇌하는 모습이다. 처음 제작 시에는 어떠한 공간도 묘사하지 않았지만 이후 여러 변형을 거쳐 뱀, 냄비, 파란 문, 불꽃으로 굽혀진 형상, 전구, 파이프, 싱크대, 깡통, 책,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기다란 건물 등이 추가된 작품이다. 깨진 창문 아래의 누추한 방에서 어깨에 초록색 나체 형상을 두르고 물이 가득 찬 양동이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름 모를 이 인물도 작가 자신일 것으로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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