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2.22 19:35
개인전 ‘Timeless’展
수행하듯 촛불과 향불로 한지 태우길 반복…
3월 28일까지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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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는 사람 피부와도 같아요. 약하지만 인위적으로 찢지 않는 한 몇 천 년까지도 보존되는 질긴 습성이 꼭 인간의 특성 같기도 하죠.” 김민정(59)에게 한지는 색색의 물감이자 회화의 대상 그리고 명상과 수행을 위한 무대다. 촛불과 향불로 한지를 태우며 그 한지에 그림 그리고 조각하는 셈이다. ‘태운다’는 다소 과격한 행위에 자칫 주객이 전도될 수 있지만, 그러한 파괴적 과정이 연상되지 않을 만큼 김민정의 작업은 조형적으로 아름다우며 장식적인 면모가 있다.
종이를 매체 삼게 된 것은 그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부친이 운영하던 인쇄소에서 종이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했다. 서예와 수채화를 공부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에 진학해 동양화를 전공했다. 이후 르네상스 미술을 향한 동경과 호기심을 안고 1991년 이탈리아로 떠났고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가 1990년대 초였어요. 당시 사진이나 비디오 같은 매체가 유행했는데, 기계를 다루는 데에는 영 취미가 없었던 저는 해오던 걸 계속 이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남들과 차별화되기 위해선 오히려 가장 잘 아는 걸 해야겠다 싶었거든요.”
서양 미술의 혁신적 조형 문법이 탄생한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피부와 같은 재료인 한지로 되돌아갔다. 한지는 동양인 김민정의 문화적 정체성과 그의 예술적 정신의 본류였다. 그는 한지를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품으로 인식하고, 이를 이용한 작업을 제작하면서도 그 고유의 성질을 돋보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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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는 먹과 수채 물감의 얼룩과 번짐 효과를 극대화한 일련의 수묵이나 채색 추상 작품을 발표했다. 수묵과 채색을 통한 컨템포러리 동양화 작업을 선보여 오던 그는 2000년대 접어들며 한지를 태우는 행위를 시작했다. “종이를 태우면 생기는 그 선과 자국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러나 또 이게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흔적이더군요. 종이에 최소한의 가해를 해 작업을 하고 싶었던 저는 태우는 행위를 계속 이어오게 됐습니다.” 동양화의 기초가 되는 선(線)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한지를 태우기 시작한 작가는 종이와 불이 ‘협업’해 만든 자연의 또 다른 선에 매료됐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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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운 한지를 재료로 삼아 장인처럼 세심한 수공과 집중의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작두로 절단하거나 불로 태워 만든 원형과 띠 형상의 색색의 한지 조각을 한지에 배치하고 색조, 형태, 질감 등을 무수히 변주하며 화면에 부유하는 공간감과 팽팽한 미적 긴장감을 만들어간다. 얇은 한지가 촘촘하게 맞물려 형성된 입체감은 잡념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작가의 손과 그 촉각적 감각을 환기하는 듯하다.
수십 년째 불을 맨손으로 끄다보니 지문이 남아있지 않다며 작가가 웃었다. “장갑 끼고 그럴 정신이 없죠. 찰나의 순간 바로바로 불을 통제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뜨겁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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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개인전 ‘타임리스(Timeless)’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는 대표 연작 <Mountain> <The Street> <Sculpture> <Story> <Timeless>를 비롯해, 새로운 연작 <The Water>와 <Couple> 등 총 30여 점의 최근작을 공개한다. 김민정은 2018년 영국 런던의 화이트 큐브, 2019년 독일 노이스의 랑겐 파운데이션, 2020년 미국 뉴욕의 힐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연이어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다. 대체 이런 작업을 왜 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인생이 너무 길어요. 시간이 많아서 태우고 있네요.” 전시는 3월 28일까지.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