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 오리지널리티④] 절제된 조형 언어로 완성한 유영국의 단순미학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1.02.19 18:30

자연 향한 애정, 기본 조형과 강렬한 원색으로 드러내
아트조선 공동 기획 TV CHOSUN 개국 10주년
특별 기념전 ‘더 오리지널’展에 1970년대작 등 내걸려
3월 9일부터 조선일보미술관

Circle-A, oil on canvas, 136x136cm, 1968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색채란 써보면 참 재미있는 거요. 옆에 어떤 색을 가져와야 이 색도 살고, 또 이 색도 살고… 심포니를 들으면 멜로디가 흐르다가 갑자기 ‘자자 잔’ 하지요. 그림도 이렇게 보는 사람에게 자극을 줄 필요가 있어요. 그림은 시각예술이니까 입하고 귀하고는 상관없고 그러니까 색은 필요한 겁니다. 나는 색채와 균형과 하모니를 이루도록 구성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40년대 청년 유영국이 카메라를 목에 메고 있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의 추상미술 토양을 다졌으며, 평생 화두였던 자연을 소재로 예술세계를 심화해온 추상미술의 선구자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혼돈의 시기를 관통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는 오늘날에도 난해하다고 하는 추상미술을 선구적으로 일찍이 시작했다. 애초에 추상미술을 주목한 것 자체가 당시 시각으로선 전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울진의 부유한 지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30년대 세계에서 가장 모던한 도시 중 하나였던 도쿄로 유학을 가는데, 이중섭의 선배로 도쿄 문화학원에서 수학하며 이때 추상미술을 접했고 김환기와 함께 한국 미술사상 최초로 추상화를 시작, 이에 천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유영국은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점, 선, 면, 색과 같은 기본 조형 요소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몰두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마음은 적색, 황색, 녹색, 청색 등 강렬한 원색으로 절절히 표현했다.
 
무제, 캔버스에 유채, 97x130.5cm, 1995 /아트조선
 
경북 울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지근거리에 바닷가를 두고 하루가 멀다고 배를 타고 나갔다고 한다. 해안이나 선상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은 유영국에게 큰 영감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빨강, 노랑 등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컬러는 모두 자연에서 따온 색채다. 이러한 원색 대비와 함께 굵은 선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색면으로써 분할 구성되는데, 흡사 발광하듯 박력 있는 컬러는 리듬감과 율동감을 자아내는 듯하다.
 
“내 그림은 주로 ‘산’이란 제목이 많은데, 그것은 산이 너무 많은 고장에서 자란 탓이다. ‘숲’이란 그림은 내가 어렸을 때 마을 앞에 놀러 다니던 숲이 생각나서 그린 것이다. 항상 나는 내가 잘 알고 또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곳에서 느낀 것을 소재로 하여 즐겨 그림을 그린다.”
 
무제, 캔버스에 유채, 53x40.9cm, 1979 /아트조선
 
그의 회화는 기하학적 조형을 형태로 한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화면 구성이 도드라진다. 가장 기본적인 조형 언어를 주체로 삼아 자연의 생명력과 본질을 대변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이 지고 뜰 때 붉게 물든 노을빛이 바닷물에 번진 모습을 동그라미와 네모로, 산은 세모로써 비구상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이처럼 자연 요소를 비구상적으로 단순화하고 응축시킨 조형들은 서로 대비되며 긴장감을 주기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모니를 동시에 빚어낸다. 그중에서도 작가는 특히 산을 모티프로 해 자연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을 화면에 옮기길 즐겼다.
 
특히 그는 나이프로 물감을 캔버스에 더욱 긴밀하게 밀착시켜 순도 높은 색채를 구현하고 요철 없이 매끄럽고 평면적인 화면을 제작했다. 작품 속 구획을 나누는 선도 붓이 아닌, 나이프로 그린 것으로 한국적인 모더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
 
“산은 자연이 부여한 하나의 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추상의 빈 그릇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가 베고 잤을지도 모르는 산가 여인숙의 헌 베개같이 축소 해석되어 한밤 내내 친근한 대화를 오가게 한다.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Work, oil on canvas, 130x130cm, 1967 /유영국미술문화재단
 
기하학적인 질서라고 하면 경직되고 엄정할 것 같지만 그의 화면을 마주하면 실제 자연 풍광을 마주하고 있는 듯 어색함 없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의 회화를 통해 역으로 재발견하는 순간이다. 구성적인 도형 속에서 자연의 원형을 발견하고 그 본질을 찾고자 했던 작가의 고민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유영국은 생전 “자연을 바탕으로 해 순수하게 추상적인 상태를 형상화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의 장남인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는 산천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엄수하며 지독하리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어린 내가 뭐하냐고 물으면 ‘그림 공부한다’고 말씀하곤 했다. 예순까지는 계속 공부해야한다며 그림 앞에선 늘 진지하고 계획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작가의 생전 성품을 설명했다.
 
유영국 모노그래프 『Yoo Youngkuk Quintessence 』(리졸리, 2020) /국제갤러리
 
지난해 12월 세계적인 예술서적 출판사 리졸리(Rizzoli)는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유영국의 모노그래프(전문연구서적) ‘유영국: 정수(Yoo Youngkuk: Quintessence)’를 발간했다. 유영국의 미술사적 가치에 주목한 리졸리가 지난 수년간의 준비 끝에 미공개작부터 대표작까지 작가의 추상세계를 총망라해 36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을 출간한 것. 이는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그를 세계 아트씬에서도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밀라노를 기반으로 아시아·태평양과 중동지역의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이자 에디터로 활동 중인 편집자 로사 마리아 팔보(Rosa Maria Falvo)는 이 책 서문을 통해 유영국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작품 속 형태들은 특정한 사물에 얽매이지 않은 채 유동적으로 진화하는 동시에, 그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 작가 표현의 결정체를 담아낸다. 자연은 부인할 여지없이 그에게 영감이 됐으며, 경이로움과 겸손함에 기반한 이 특별한 유대는 그가 살면서 경험한 파괴와 비극을 향한 갈망에 맞서는 이로운 해독제 역할을 해줬다.”
 
TV CHOSUN 개국 10주년 특별 기념전 ‘더 오리지널’ 포스터 /아트조선
 
TV CHOSUN 개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아트조선 공동 기획 특별전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전: 더 오리지널’이 다가오는 3월 9일부터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을 연상하는 유영국의 작품이 내걸린다. 사실적으로 재현한 풍광이 아님에도 추상적으로 단순화된 유영국의 조형을 두고 왜 자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02)724-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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