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 그가 내게 말을 거네… 김근태 ‘선리선경’展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1.01.11 22:34

북한산 암벽 형상화한 대작부터
울트라마린 색감의 신작까지
2월 19일까지 청담동 노블레스컬렉션

김근태 개인전 ‘선리선경’ 전경 /노블레스컬렉션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다. 김근태(68)의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형태도 이미지도 없는 칠흑빛 화면(畫面)에 고준한 산세와 깎아지른 듯 거센 암벽이 펼쳐진다. 거친 마티에르가 도드라지는 표면에 자연광이 드리우며 빚어낸 명암이 흡사 기세등등한 바위산의 그것을 연상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져 다시 본 그림에 산은 온데간데없다. 속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어둠만이 화면을 가득 채울 뿐이다.
 
Discussion 2020-50, 181x227cm, Oil on Canvas, 2020 /노블레스컬렉션
 
화실에서 작업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면 김근태는 근처에 있는 북한산을 찾곤 했다. 육중한 암벽을 바라보며 작가는 물리적 시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들었다. 1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같은 암벽을 바라봤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과거와 현재라는 구분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저 암벽은 같은 모양을 하고 같은 자리에 있었을 거고, 지금 내가 바라보듯 그때의 누군가도 저 암벽을 바라봤을 테죠. 태초의 자연 앞에서도 무한한 시간의 영속성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김근태 개인전 ‘선리선경’ 전경 /노블레스컬렉션
 
평소 자연을 가까이하고 그 안에서 영감을 얻던 그가 어느 날 북한산 암벽을 마주하다 불현듯 얻은 깨우침을 담은 검은색 대작 <Discussion 2020-50>이 개인전 ‘선리선경(禪理禪境)’에 걸렸다. ‘선리선경’이란 선을 통해 궁극의 이치를 깨친 후 새롭게 보게 되는 선의 경지를 뜻한다. 
 
김근태는 세필이 하나하나 훑고 지나간 듯 섬세한 결이 고스란히 드러난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오색찬란한 색채나 화려한 이미지 없이 정갈한 붓질로 닦이고 닦인 ‘붓길’만이 자리할 뿐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 새벽 여명이 비추는 적막한 백색 설원을, 때로는 너울이 일렁이는 심해를 떠올리게 하는 회화다. 작가의 숨을 담아 몇 겹이고 포개져 두터운 덧칠과 담박한 색만으로 궁극의 그득함을 완성해내는 것이다. 
 
김근태 개인전 ‘선리선경’ 전경 /노블레스컬렉션
Discussion 2019-58, 117x91cm, Oil on Canvas, 2019
 
그랬던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는 정결한 붓질이 아닌, 남성적이고 투박한 붓질을 내보인다. 수행하듯 작업해온 그에게 있어 이런 행보가 일견 파격적으로만 보일 수 있으나, 이는 흥미로운 비화에서 기인한 필연적 변화다. 흑탄처럼 시커먼 <Discussion 2019-58>의 화면을 유유히 횡단하는 굵은 붓질 아래로 허연 물감이 비죽 튀어나왔다. 작업 중 역정이 난 작가가 평소에 하지 않던 성긴 붓질을 냅다 캔버스에 그어버린 흔적이다. 숨결을 불어 넣듯 붓질을 켜켜이 쌓는 그의 기존 작업 방식과는 전혀 다른 행위였으므로 작가에게는 일종의 일탈이었다.
 
다음날 그는 이를 다시 고쳐 그리지 않았다. 전날 밤 분출하듯 죽 그어버린 그 붓질이 지금껏 자각하지 못한, 자신 안에 내재한 뜨거운 무엇인가였을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화면에 쉬 드러내지 않았던 김근태의 맹렬한 붓질과 정열은 이렇듯 그의 무의식과 우연에서 비롯돼 이듬해 암벽을 형상화한 듯한 <Discussion 2020-50>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됐다.
 
김근태 개인전 ‘선리선경’ 전경 /노블레스컬렉션
 
본래 작가는 혹여 자신의 실수처럼 보일 수 있는 그림인 <Discussion 2019-58>을 출품하길 꺼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수전 노블레스컬렉션 전시팀장이 출품을 강력하게 주장해 전시장에서 선보일 수 있었다. 실제 박 팀장은 이 작품을 자신의 ‘최애’로 뽑았다. “<Discussion 2019-58>은 전시장 입구 맞은편 벽에 걸어 공간을 들어서면 바로 볼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쓴 작품이죠. 상흔과도 같아 보이는 저 붓질은 작가의 실수가 아닌, 작가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강렬하고 역동적인 화면에 대한 니즈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계기이자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근태 개인전 ‘선리선경’ 전경 /노블레스컬렉션
 
김근태 개인전 ‘선리선경’이 서울 청담동 노블레스컬렉션에서 개최된다. 그동안 검은색과 흰색 작품을 주로 선보여온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운 색을 시도했다. 울트라마린 색상으로 바다와 하늘의 허상과 같은 경계를 보여주며, 세련된 올리브그린 색감으로 다가올 봄을 향한 설렘을 전하기도 한다. 2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