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2.23 19:46
‘언어의 힘’ 보여주는 대표작 ‘경구들’,
뮬러 보고서 바탕으로 한 수채화 신작 등
9년 만의 국내 상업화랑 개인전서 선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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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쁜 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다.’
‘나쁜 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다.’
누가 소리 내서 말하는 것도 아닌데, 한마디 한마디가 눈과 귀에 쏙쏙 박히는 듯하다. 가늘고 긴 LED 전광판에 한줄 한줄 번쩍이며 빠르게, 때론 느리게 지나가는 문장들에서 말투와 억양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천장에 매달려 수직으로 설치된 3미터 길이의 LED 작업은 제니 홀저(Jenny Holzer·70)의 대표작 <경구들(Truism)>(2020)이다. 홀저가 직접 작성하고 선별한 문장들 240개가 국문과 영문으로 번갈아가며 7시간 재생된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텍스트를 매개로 개인적 이슈부터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사안까지 거침없이 다뤄왔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목소리를 내는 그의 작업에 호불호도 있지만, 명실공히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다. 지난해 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과천관에 선보인 커미션 작품으로 한국 관람객에게도 익숙하다. 홀저는 제44회 베네치아비엔날레(1990) 미국관을 대표하는 첫 여성 작가로 선정, 같은 해에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이후 뉴욕과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루브르 아부다비, 월드트레이드센터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시그니처로 꼽히는 텍스트 작업은 1970년대 후반부터 격언, 속담, 잠언 등과 같은 형식을 빌린 경구들을 뉴욕 거리에 게시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엄격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명령조로 공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경구는 홀저의 트레이드마크다. 그중 <서바이벌(Survival)> 시리즈의 일환인 ‘Protect Me From What I Want’는 공공예술로서 1985년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내걸려 대중에게도 친숙한 문구다.
1980년대 초반부터 LED를 즐겨 사용해왔는데, 움직이는 LED 사인의 형태가 구두로 전달하는 사람의 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LED로 글자를 강조할 수 있고 흐르게 하거나 멈출 수도 있는데 이게 사람의 목소리와 억양을 시각화한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실제 그의 LED 작업은 번쩍이는 텍스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문구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강렬하게 주입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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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는 또 다른 형태로 그의 작업에 차용된다. 홀저의 <검열 회화(Redaction Paintings)> 시리즈는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를 화면에 추상화로 번안한 것으로, 정보 공개법에 따라 공개된 문서이면서도 이미 상당 부분 지워진 상태로 공개된 모순적인 상황을 꼬집는다. 실제 문서를 린넨 위에 그대로 옮겨와 다소 적나라한 내용을 읽어볼 수 있으며, 검열 막대기도 금박 등으로 그대로 재현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최근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의 당선을 도왔다는 의혹에 대한 FBI 수사 결과를 담은 ‘뮬러 보고서(Mueller Report)’를 바탕으로 제작한 수채화다.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추문> <궁극의 죄악> 등 대담한 타이틀을 단 36점 연작은 모두 올해 작업한 최신작이다. 홀저는 자신의 회화나 LED 작업을 대리석 벤치와 함께 병치해 설치하곤 한다. 대리석 조각에도 역시 텍스트가 새겨지는데, 이 음각을 손가락으로 따라 읽음으로써 언어를 촉각적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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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홀저 개인전 ‘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K2·3관에서 열린다.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간결한 경구를 담은 LED, 대리석 벤치 작품부터 비밀 정부 문서를 통해 정보의 은폐와 공유에 대해 고찰하는 회화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채로운 작업이 걸렸다. 2020년 한 해가 저물어가며 새로운 신년을 기다리는 현 시점에서 작가는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란 뜻을 전시명에 담아 화두를 던진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전례 없는 혼란에 처해있는 지금, 홀저는 한 경구를 통해 메시지를 전해왔다. ‘자기 혼란은 정직함을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1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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