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2.07 21:27
[최병소]
5년 만에 서울에서의 개인전
아라리오갤러리 ‘의미와 무의미’展
개념성과 실험성 강한 1970년대 구작 재조명
2016년 이어 재현한 7미터 길이 설치 작품도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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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게 얽히고설킨 흰 선들이 전시장 바닥을 한가득 메운다. 흰색 철제 옷걸이 8000개가 모여 세로 7미터, 가로 4미터짜리 백색 벌판이다. ‘지워서 그리는 그림’인 신문지 작업으로 대표되는 최병소(77)의 현장 설치 작품 <무제 016000>(2016)다. 세탁소 철제 옷걸이 한 개를 우연적으로 구부려 보는 것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그의 신문 작업에서의 연필과 같은 의미로 옷걸이가 사용됐다. 작가는 하찮은 물건과 행위 모두 그 시대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음을 직시함으로써, 예술을 생산해내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이른다. 시시하고 유연한 철제 옷걸이들은 구부러져 백색의 선으로, 그리고 단색의 공간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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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최병소는 중앙대 미대 졸업 후, 박현기, 이강소 등과 함께 국내 실험미술을 선구하며 화단에 등장, 한국 전위미술을 전개했다. 전시 비수기인 7월 말 여름에 전시장을 빌렸는데도 대관료를 깎아주지 않아 화가 난 그가 생선을 난도질해 전시장 한가운데 놔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설치 하루 만에 그의 동의도 없이 철거된 그 생선이 일종의 해프닝 작품 <칼>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돼 온 한국 작가들의 실험적 시도의 원동력에는 형식주의 예술에 대한 저항, 내면으로 침잠하던 추상미술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최병소의 작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작업 역시 초창기부터 기저에는 반예술(反藝術)적 태도가 깔려있었다. 그는 신문지, 연필, 볼펜은 물론이고 의자, 잡지 사진, 안개꽃 등 하찮게 여기는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매체의 순수성, 형식주의 모더니즘과 같은 미술의 위계를 전복하고자 했다. 청년 최병소는 이젤과 캔버스란 틀을 벗어나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생활용품 따위를 소재로 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업하고 싶었다.
최병소의 대표작인 신문 지우기 연작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는 그가 평생을 매진해온 실험적 정신의 실천이다. 재료비가 거의 들지 않은 일상의 사물을 지지체와 화구로 선택해 당시 시대적 상황에 의해 탄압의 대상이었던 신문을 까맣게 지우며 사회에 대한 저항의 몸짓을 기록해갔다. 오늘날 최병소의 신문 지우기 작업은 자신을 지우는 움직임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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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외에도 잡지 사진을 활용해 사진의 시각 이미지를 언어로 해석, 지시하는 작품도 1970년대 탄생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 사진을 이용해 제작한 <무제 9750000-1>(1975)와 의자 위에 사물을 놓고 촬영한 사진과 문자를 결합한 <무제 9750000-2>(1975)는 시각언어와 문자언어 간의 해석 차이를 노출해 시각 예술이 언어이자 곧 개념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사진의 이미지는 이를 형용하는 문자와 결합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게 되며, 의미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어긋남을 의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닐고 있는 두 마리의 새와 그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의 결합, 의자에 올려진 사물들과 그 사물을 지시하는 단어들의 결합에서 관람객은 도리어 상황과 현실을 담을 그릇으로 언어가 가진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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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개인전 <의미(意味)와 무의미(無意味): Works from 1974 to 2020>이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예술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1970년대 초기 작품과 최근의 작품을 병치시킴으로써, 1970년대 초반 전위적 한국 실험미술의 태동과 단색화의 경향을 관통하고 있는 최병소만의 독특한 미술사적 위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과거 최병소의 작업실이 침수돼 1970~1980년대 작품 대다수가 파손됐는데, 현재 남아있는 1970년대 사진 작업으로는 유일한 두 작품 <무제 9750000-1> <무제 9750000-2>가 이번 전시에 걸렸다. 2016년 아라리오뮤지엄 제주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선보인 바 있는 옷걸이 작품 <무제 016000>는 당시보다 옷걸이를 두 배 넘게 들여 재현했다. 이외에도 1975년 ‘대구현대미술제’에 출품했던 여러 개의 접의자를 배치한 <무제 9750000-3>(1975)도 다시 볼 수 있다.
주연화 아라리오갤러리 디렉터는 “최병소는 한국 실험미술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던 때부터 홀로 묵묵히 작업에 몰두해왔다. 작품에 사인조차도 2016년부터서야 하기 시작했다. 신문지 작업은 언어를 지우고 논리 체계를 지우는 행위로 이를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이다. 일견 단색화로 보일 수 있지만, 이면에는 사회를 향한 목소리가 간접적으로 숨어있다”라고 설명했다. 최병소는 화업 평생 예술과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주류 체계를 부정하며 그 체계를 해체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다. 작가가 평생 탐색해온 예술과 반예술,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열린 가능성이 무엇인지 이번 전시에서 읽을 수 있다. 내년 2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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