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한국 생활 6년 차 美작가가 그리는 극적 풍경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0.12.03 22:55

[브리타니 패닝]
과감한 색감과 이국적인 화면,
지난달 서울옥션 제로베이스서 미술애호가들에 눈도장

Ride or Die,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116x81cm, 2020 ⓒBrittany Fanning
 
이젤 앞에 앉은 브리타니 패닝. 그는 한국 생활 6년째에 접어든 미국인 작가로, 최근 서울옥션 제로베이스 경매에서 국내 미술애호가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윤다함 기자
 
네온 핑크빛 하늘을 가로지르며 추락하는 비행기와 그 아래로는 한 여성이 수영장 앞에 누워 이를 한가로이 지켜보며 태닝을 즐긴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극적으로 더욱 배가시키는 것은 채도 높은 강렬한 분홍색 하늘과 새빨간 수영복을 입은 여성의 태연함이다. 브리타니 패닝(Brittany Fanning·28)은 비현실적이고도 아이러니한 풍경을 위트 있게 그려낸다. 화려한 컬러로 물든 환상적인 풍경 이면에는 블랙 유머가 숨어 있다. 지난 11월 16일 진행된 서울옥션 제로베이스 온라인 경매에 그가 출품한 12점의 작품 중 가장 고가에 낙찰된 <Comanche and Warrior>도 다르지 않다. 전통 복장을 차려입고 말을 탄 인디언과 라운지 체어에 누워 태닝 중인 금발의 여인이 등장하는 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화면에도 반전이 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무언가를 씹는다든지, 스피커폰으로 시끄럽게 통화할 때 거슬리는데,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봤어요. 사실 이 그림은 인디언이 여자를 살해하기 직전의 장면이에요. 작품 구매자는 이 둘이 사랑에 빠지는 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림 속에서 아직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피해자는 누가 될지,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보는 이에게 달린 셈이죠.” 화면 속 기발한 스토리는 영화, 드라마, 코미디쇼 등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되는데, 특히 작업할 때면 범죄 실화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단다. 
 
Comanche and Warrior,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116x81cm, 2020 ⓒBrittany Fanning
 
빛나는 수영장 수면 위로 화염방사기를 쏴대며 웃는 남성과 마가리타를 마시며 이를 바라보는 여성을 그린 <Ride or Die>는 영화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2019)의 엔딩 장면을 모티프로 삼았다. 이 작품은 올해 초 미국의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 탐 시그라(Tom Segura)가 사갔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 작품을 사고 싶다고 제게 먼저 연락이 왔을 때 정말 너무나 깜짝 놀라고 믿을 수가 없었어요. 모티프가 된 영화의 장면은 다소 폭력적이고 과할 수 있는 클라이맥스의 한 부분인데, 이게 실제였다면 끔찍했겠지만, 저는 과도함이 너무 과할 때 오는 유머러스함이 좋더라고요. 영화에서의 그 느낌을 차용해 그림으로 표현한 거죠.” 또한 주황, 노랑, 초록, 보라 등 과감한 원색의 조합은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의 작품과 1960년대풍의 컬러 콤비네이션에서 영향을 받았다.
 
패닝의 작업실 이곳저곳에는 한창 작업 중인 신작들이 놓여 있었다. /윤다함 기자
Tiger Whiskers, Acrylic and Oil on Canvas, 65x100cm, 2020 ⓒBrittany Fanning
 
패닝의 여러 그림에는 반복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 속 등장인물 대다수에 얼굴이 없다는 것. “표정보다도 인물이 입고 있는 패션이나 몸짓을 통해 분위기를 구사하고 싶었어요. 만약 인물에게 표정이 있다면 다른 걸 채 보기도 전에 그 그림의 결말이나 내용은 이미 정해질 거예요. 얼굴이 없음으로써 즉각적인 감정을 일으킬 수 없는 대신, 보는 이는 자신을 투영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원색의 저지 트랙수트, 오래된 군모와 같은 특징적인 룩이나 배배 꼰 다리, 운동하며 감자튀김을 먹는 행위 등이 그러한 예다.
 
수많은 건물이 빼곡하게 서로 겹치고 쌓인 풍경을 담은 그의 또 다른 시리즈 <Korean Architecture>는 그야말로 서울의 재발견이다. 패닝은 정작 서울시민은 잊고 있던 서울의 근사한 면모를 아크릴과 자수를 통해 개성 있게 구현했다. 이태원 경리단길에 위치한 자신의 집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뷰를 비롯해 해방촌, 한남동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재현했다. 특히 오래된 전통 건축물과 현대적이고 기하학적인 빌딩이 한데 공존하는 모습에 큰 흥미를 느낀다고 설명했다. “플로리다와 조지아에서 자랐는데, 플로리다는 지대가 주로 평평하고, 조지아에서는 작은 산골 동네에서 살았어요. 서울은 제가 나고 자란 동네와는 전혀 달라 처음 왔을 때 인상 깊었어요. 서울은 어디에서나 산이 보이고 사람도 빌딩도 여기저기 많잖아요.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한 도시랄까요.”
 
View #1, Acrylic and Embroidery on Linen, 96x71cm, 2019 ⓒBrittany Fanning
 
최근에는 새로운 시리즈에 몰두하고 있다. 어렸을 때 보고 자란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아 이들 캐릭터의 형상을 최소한의 특징만 남긴 뒤 추상적으로 나타낸 회화다. 기존의 작업과는 구별되지만, 톡톡 튀는 이국적인 색감과 다크 유머는 여전하다. “제 그림에는 지속적으로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가 등장해요. 팬데믹으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이때, 제가 그려내는 블랙 유머가 보는 이를 유쾌하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