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더비가 주목한 ‘사모님’의 그림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0.12.01 10:05

[소피창]
홍콩 소더비서 연달아 억대 낙찰…
전통 기법의 현대화에 도전하는 추상 산수화
세계 반도체 1위 ‘TSMC’ 창업주 부인이란 이색 배경
‘2020 Art Chosun on Stage’
한국 첫 개인전 ‘스며들다, 점점 더’
12월 18일 조선일보미술관서 개막

Flowing World, 227x182cm, Oil, Ink and Acrylic on Canvas, 2020
 
지난해 10월 홍콩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작품 두 점이 한화 5억4000만원에, 올해 7월에는 추상화 한 점이 3억3000만원에 낙찰되는 등 대만 추상화가 소피창(Sophie Chang)을 향한 국제 미술계의 관심이 심상치 않다. 전통 산수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추상화로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한 그에게 작가로서의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시가총액 기준 세계 반도체 1위 기업 TSMC 창업주 모리스창(Morris Chang)의 부인이라는 점이다. 현재 대만에 거주하며 작업 중인 소피창이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앞둔 소감을 영상을 통해 전해왔다. 화상 통화로 만난 그의 인상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쏘쿨’이었다.
 
Dancing Wind I, 227x182cm, Ink, Gold Leaf and Acrylic on Canvas, 2020
 
영상 통화가 연결되자 웃음이 가득한 소피창의 모습과 그의 뒤로 벽을 빼곡하게 메운 대작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스튜디오 투어를 직접 시켜주는 그에게 작업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하고 쾌적해 보이는 환경을 언급하자 “남편이 마련해준 곳”이라며 미소지었다. “제가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뒤, 길을 잃지 않도록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아낌없이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입니다. 저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죠.”
 
소피창이 처음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 건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게 되면서부터다. 친구가 운영하는 미술학습반이 정원을 충당하지 못해 머릿수를 채워주기 위해서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창작의 기쁨을 경험하고 지금껏 14년째 화업을 이어오고 있다. 다소 우연적인 시작이 무색하리만큼 소피창은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정립하고, 고유의 화풍은 세계 미술시장의 인정을 받고 있다.
 
ⓒSophie Chang
 
자연을 소재로 한 추상 산수화 작업에 몰두해오고 있는 작가는 동양 산수화의 기법에 캔버스, 아크릴, 오일 등 서양의 재료를 접목해 동서양을 자유로이 오가는 독창적인 화면을 완성한다. 이를테면, 먹과 한지를 유화와 캔버스로 대치하고 아크릴과 아교를 섞고 금박이를 콜라주 하는 등의 새로운 해석 방식을 제시하는 식이다. 작품세계는 불교 선의 수행방식을 따르는 한편, 작품 내용과 형식에서는 전통 산수화의 현대화를 향한 도전과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동시에 전통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그의 작업에서의 핵심 기법은 ‘지묵법(漬墨法)’이다. 먹의 수성에 따라 스며들어 적시는 특성을 강조한 이 기법을 통해 자연의 역동성과 생동하는 듯한 강한 에너지를 표현한다. “전통 중국화 이념에서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지묵법을 차용하게 됐죠. 제 작업과정에서 ‘기’는 붓의 속도감, ‘운’은 전체 화면의 리듬이라면, ‘생’은 화면 공간의 확장인 생장(生長)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은 바로 생동하는 에너지의 표현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와도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가 중시여기는 지점은 전통과 현대의 융합이다. 중국 산수화에는 여백이 존재했다면 작가는 공백을 콜라주로 채우길 택했고, 더욱 유연하고 밝은 느낌의 화면을 위해 흑백이 아닌 색채를 도입했다. 유화와 수묵을 함께 사용해 전통화와 서양화의 화합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가 화려하고 강렬한 컬러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채로운 색을 통해 생명력을 균형적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제게 있어 색깔이란 제게 잠재된 내면의 균형입니다.”
 
From Permeation to Gradualism, 260x1200cm(Installation), Acrylic, Oil, Hamp Paper on Canvas, 2020
 
그는 하루를 아침 명상으로 시작한다. 3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그의 창작 리추얼인 셈이다. “작업을 위한 가장 기본 행위이죠. 작업할 때면 늘 불교 보살의 마음을 연상하며 임하려고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를 화면으로 옮기고 싶거든요.” 다년간의 명상은 작가에게 감정을 포착하고 세속 너머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의식을 깨닫게 해줬다. 명상에서 시작해 작업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수련을 통해 그는 내면의 불안과 화합하며 마음을 정화하는 화면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
 
The Immeasurable IV, 72.8x60.5cm, Acrylic on Canvas, 2018
ⓒSophie Chang
 
아트조선 기획전 ‘스며들다, 점점 더: 소피창’이 12월 18일부터 12월 27일까지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다. 작가가 십여 년간 몰두해온 추상화의 새로운 변주를 보여주며 근작부터 신작까지 60여 점을 내건다. 한국 관람객과 처음 마주하는 자리인 만큼 전시 타이틀은 작가 고유의 화법을 뜻하며, 동시에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어졌다. “전시명은 제 작업 방식과 태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스며들다’는 지묵법과 관련된 기법이라면, ‘점점 더’는 불교 수행의 점수(漸修)에서 따온 것으로 예술적 수행을 의미하죠. 제겐 지묵법 자체가 예술 창작의 중심부로 더욱 심도 있게 들어가는 과정과 같기 때문입니다.”
 
소피창과 그의 남편 모리스창은 이번 전시를 앞두고 방한을 예정하고 있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안타깝게도 계획이 무산돼 전시에 직접 자리하지는 못한다. 두 내외는 이에 깊은 아쉬움을 표하며 다음을 기약한다고 전해왔다. 그러나 전시 오프닝 리셉션이 인스타그램 라이브와 줌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으로, 리셉션 당일 전시장에서 온라인으로 작가와 만날 수 있다. (02)724-7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