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1.13 17:26
[박민준]
2년 만에 개인전 ‘두 개의 깃발’
신작 잉크화 ‘신념의 탑’ 비롯해 조각, 설치 등
직접 집필한 전시명 동명 소설 출간하기도
12월 19일까지 노블레스컬렉션

노화가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 속 소년이 화면에서 나와 현실 세계로 환생(幻生)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소년의 이름은 여러 세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 미술상으로 남게 된다. 불멸을 갈망했던 노장의 바람이 그렇게 이뤄진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극무대가 펼쳐지듯 호화롭고도 환상적인 분위기의 회화와 조각이 관람객을 매혹한다. 박민준(49)이 2년 만에 개인전을 가진다. 그의 아홉 번째 개인전 ‘두 개의 깃발(Two Flags)’이 서울 청담동 노블레스컬렉션에서 열린다. 서구 고전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정밀한 회화적 필법과 표현법은 가상 세계로의 몰입도를 더욱 가중한다. 카라바죠의 테네브리즘(Tenebrism)을 연상하는 박민준의 화풍은 지난 2년 전 갤러리현대에서의 개인전 ‘라포르 서커스’에서도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작품 속 정교하고도 견고한 세계는 오롯이 그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건설된다. 박민준이 전시 때마다 전시 타이틀과 동명의 소설책을 출간하는 이유다. 이번에도 소설 ‘두 개의 깃발’을 집필해 전시장에 함께 전시한다. 노화가가 그린 그림 속의 소년이 화면 밖으로 나와 실제 인물이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박민준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소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의 화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설은 화면 속 인물과 캐릭터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그는 숫자의 구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사유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를 전시의 중심테마로도 가져왔다. 이를테면 ‘2’는 삶과 죽음, 음양(陰陽), 남과 여와 같은 만물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숫자로서 대립과 합일과 같은 관계성을 함축하며, 더 나아가 ‘3’은 여기에 한 요소가 더해진 것으로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수이고, ‘4’는 지수화풍(地水火風)과 같은 네 가지 요소로 이뤄진 완전한 세계를 드러내는 숫자에 해당한다. 작가는 이 숫자들이 드러내는 상징적 영역을 탐구해 작품 속에 담았다.

그간 유화 작업을 주로 선보여 왔는데, 이번에는 종이에 그린 잉크화와 조각, 패브릭 설치 작업 등을 공개한다. 덧칠이 가능한 유화와는 달리 잉크화 작업은 수정이 불가능하기에 그만큼 작가의 내공과 숙련된 기법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홍익대 회화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 정통 회화기법을 도제방식으로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박민준은 여전히 견습생처럼 회화의 바탕이 되는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자 한다.
전시의 메인 작품 <신념의 탑>과 <영원의 탑>은 각각 높이 2미터에 이르는 대형 잉크화다. 압도적인 사이즈와 더불어 화면에 담긴 의미도 심오하다. 작품에는 작가가 저술한 소설 속의 여러 상징들이 배치돼 있는데, 이러한 상징들을 모두 흑백 명암으로만 표현함으로써, 신의 영역을 상징하는 황금색과의 극적인 대비의 효과를 연출한다.

대작 두 점 외에도 12점의 잉크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2라는 숫자는 고대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천체가 공유한 1년의 시간, 즉 12개의 달을 의미한다. 이 작품들은 전시장 중앙에 설치된 두 점의 조각상 <플로라>와 <소년>을 감싸며 벽을 따라 설치돼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플로라는 꽃이란 뜻으로 자연을 상징하며, 소년은 영원한 존재를 대변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이를 은유하는 상징적 의미를 대입해보는 재미가 있다. 박민준의 잉크화는 일견 정제된 것 같은 차분한 느낌을 풍기면서도 동시에 호화로운 장식과 신비로운 장면이 동시에 공존하며 그가 만든 환상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듯하다. 전시는 12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