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붓질로 재현한 그날 밤 기억의 조각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0.10.28 15:47

[장재민]
“풍경을 겪어내는 회화”
개인전 ‘부엉이 숲’
11월 15일까지 학고재 본관

부엉이 숲, 2020, 캔버스에 유채, 194x259cm ⓒLim Jang Hwal
어두운 밤, 한 남자가 축축하고 음침한 숲속을 쏘다니며 부엉이를 쫒는다. 그러나 그의 눈에 부엉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를 부엉이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유령처럼 지켜보고 있다.
 
“사실 부엉이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어요. 그러나 부엉이의 울음소리만큼은 매일 밤 들었어요. 청각적 경험에다가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제 상상력을 더해 화면으로 옮긴 셈이죠.” 그토록 부엉이를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결국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장재민(36)은 그렇게 <부엉이 숲>(2020)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프랑스 브르타뉴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 레지던시 생활 당시의 경험에서 기인했다.
 
한밤중에 혼자, 2019, 캔버스에 유채, 54x73cm ⓒLim Jang Hwal
장재민 개인전 ‘부엉이 숲’ 전경 /학고재
 
부엉이의 깃털은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워 움직일 때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기척이 없는 동물이라 아무리 밝은 낮에도 쉬 발견하기 어렵다. 장재민의 추상적인 붓질 뒤에는 부엉이 여섯 마리가 숨어 있다. 유령처럼 희미하게 비치는 듯하지만 그게 과연 부엉이가 맞는지 확신은 서지 않는다. 작가 역시 부엉이를 본 적이 없는 탓에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바탕으로 이들의 형상을 어렴풋하게 그려냈다. 기억의 선명도에 따라 붓질의 세기가 달라지는 까닭이다. 그날 밤, 작가는 어둠 속에서 시야가 제한된 상태에서 시각 외의 감각이 더욱 곤두섰을 테고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마치 온몸을 휘감 듯 귀에 왕왕 울렸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경험과 기억을 화면에서 읽을 수 있다.
 
기존 작업과 사뭇 다른 느낌의 화면은 바뀐 붓 크기 때문이다. 두꺼운 붓으로 그려 보다 거칠고 힘차게 표현됨과 동시에 변수를 개입시켜 우연적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 덕분에 화면은 재료의 물성을 강하게 드러내며 점도 높은 붓질이 시각에 앞서 촉각을 자극한다. 마치 작가의 호흡과 움직임이 화면 밖으로 침윤하듯 생동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다른 매체보다도 회화는 사람의 몸짓을 크게 반영하기 마련인데, 붓질은 지문이나 발자국처럼 작가의 고유한 흔적과 자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장재민의 붓질은 크고 빠르며, 신체의 동세를 최대로 활용하며 획을 긋는다. 붓의 무게와 물감의 점성을 극복하며 도구와 힘겨루기하듯이 그리는데, 우스갯소리로 ‘장재민은 어깨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그림은 힘차고 점성 높은 붓질이 도드라진다.
 
저수지 상류, 2020, 캔버스에 유채, 312x235cm ⓒLim Jang Hwal
장재민 개인전 ‘부엉이 숲’ 전경 /학고재
 
작가는 주로 고립된 저개발 지역 특유의 음습한 분위기를 탐닉해왔다. 그중 저수지나 물가 풍경은 그의 단골 소재 중 하나다. “물이 모이는 곳은 가변적 요인이 많아요. 한동안은 한국의 전형적인 낚시터나 저수지 풍경에 빠졌었죠. 실제로 낚시를 무지 좋아하기도 하고요.” 도시 근교의 저수지 낚시터에 자주 방문하는데, 그에게는 일상에서 벗어나 현재의 경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곳이다. 적막한 자연 속에 고립돼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오감이 생생하게 살아난다고 그는 설명한다. 500호 크기에 가까운 새로운 대작 <저수지 상류>(2020)는 경기 양주 기산저수지의 풍경을 담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형 저수지 주변에는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도는데, 이를 화면에 그대로 옮긴 듯하다. 
 
장재민 개인전 ‘부엉이 숲’ 전경 /학고재
장승들, 2020, 캔버스에 유채, 91x117cm ⓒLim Jang Hwal
 
장재민 개인전 ‘부엉이 숲’이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린다. 동시대 미술계가 주목하는 청년 작가를 지속적으로 조명하고 발굴해온 학고재가 이번에 선택한 주인공이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후, 첫 개인전을 가진 2014년 제36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로 뽑혔고, 2015년에는 제4회 종근당 예술지상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 제15회 금호 영아티스트와 포스코미술관 신진작가 공모에 연이어 선정되는 등 저돌적인 행보로 국내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풀 속의 둥근 것, 2019, 캔버스에 유채, 40x40cm ⓒLim Jang Hwal
 
장재민의 작업은 이미 겪어낸 풍경을 재차 경험하는 일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시간이 뒤섞여 끊임없이 새로운 장면을 이끌어낸다. 오색찬란하지 않거니와 시간대나 계절을 유추하기 힘든 다소 음울한 색감이 감도는 화면처럼 작가의 성격도 그러할까. “저는 오히려 제 그림에 색이 너무 많다고 생각이 들어 그것을 누르려고 하는 걸요. 무언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표현하는 게 부담스러워 우회를 많이 하죠. 그래서 그리고 또 지워내고 상상하기를 반복하다보니 특유의 분위기가 감지되는 그림이 나오는 것 같아요. 우울한 사람은 전혀 아니랍니다. 하하” 전시는 11월 15일까지.
 
장재민 작가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