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0.20 23:41
[윤상렬]
정글짐 모티프로 소소한 기억의 중첩 표현
기존 연작에서 파생된 새로운 회화·조각 시리즈 발표
개인전 ‘조금 낮게 조금 높게’
11월 8일까지 경기 파주 갤러리소소
윤상렬(50)은 샤프심이란 아날로그 소재와 3D 디지털 방식을 결합한 고유의 작업으로, 새로운 물성을 빚어내 평면임에도 모호한 깊이감과 공간감을 회화로써 실현한 작가다. 국내외 미술계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대표작 <다중 징표> <침묵> 시리즈는 작가의 개인적인 두려움과 내외부적 갈등에서 기인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셀 수 없이 무수한 직선들은 그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윤상렬의 회화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거듭하며 극도의 자기 집중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뤄낸 자가 치유의 일환이자 불안감을 희석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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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표한 신작 <조금 낮게 조금 높게>는 이렇게 10년 넘게 이어온 기존 작업의 확장판이다. 외형적으로는 이전 작업과 확연히 구분되는 형상을 지니면서, 그와 동시에 윤상렬의 작업세계가 어디서 어떻게 발아했는지를 내포하는 프롤로그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윤상렬은 자신의 작업 방식과 형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스스로 더듬고 추적했고 그 끝에 다다른 곳이 어린 시절 뛰놀던 ‘정글짐’이었다고 설명한다. 날카롭고 냉철한 화면과 조각은 어릴 적 소소한 기억 모음에서 비롯됐던 것.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거리가 있으면 혼자 정글짐에 올라가 앉아 있곤 했어요.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급하게 오르다가 떨어져 다친 적도 있었고요. 이렇듯 별것 아닐 수 있는 작은 기억들이 하나하나 모이고 공든 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무너지지 않고 오늘날 제 작업에서 드러났나 봅니다.” 복잡한 회로나 다차원의 공간을 연상하는 조각은 수 없는 선이 겹쳐져 이뤄지듯, 작가의 기억과 지난 시간이 거듭 중첩돼 담겨있는 것을 나타낸다. 백색 평면 위에 선을 음각으로 표현해 미세한 공간감을 보여주는 회화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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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렬의 작업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감성과 이성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작도 그런 점에서 기존 작품과 궤를 같이 한다. 이번에는 최첨단 레이저 커팅 기술을 도입해 신작을 구현했다. “재밌는 점은 레이저 커팅은 분명 기계가 하는 건데, 그 기계가 오롯이 기계적이지만은 않더라는 것입니다. 기계를 작동하는 사람을 닮게 된다는 걸 경험했어요. 원하는 모양이 나오기까지 그만큼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죠.” 정교한 모양은 기계가 냈다면 채색은 일일이 직접 손으로 문질러 작가의 온몸으로 완성했다. 탁본하듯이 문지르고 두드린 덕분에 손맛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날카롭고 세밀한 선으로 이뤄진 이전 회화 작업은 그의 영민한 감각과 날 선 손끝에서 이뤄지곤 했다. 그래야만 비현실적일 만큼 그토록 가느다랗고 촘촘한 선들이 나올 수 있었다. 새로운 시리즈는 그 선을 비비고 뭉개어 면으로 펼쳐냈다. 그러나 그의 화면에서 침윤하는 특유의 묘한 긴장감은 어디 가지 않았다. 작품의 형태는 바뀌었어도 바짝 조인 듯한 완벽주의적인 면모는 여전하다. 이성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 똑 떨어지는 깔끔함과 단순함에서 실제 작가의 성품이 읽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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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완벽하게 하려는 작가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그저 최선을 다하는 작가일 뿐이죠. 작업에 있어서 완벽주의는 병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직업의식이 아닐까요. 오히려 그렇게 정결히 정리된 화면이 저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게 평소 제 모습이나 습관과 별반 차이가 없거든요. 작품이란 평범함에 있는 것이니까요.”
무언가를 세우고 쌓는 것이 즐거웠던 그는 한때 건축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한결 같이 첨예하고 조밀하면서도 보는 이에게 견고한 안정감을 주는 이유다. “지금껏 돌이켜보면 저는 항상 선상(線上)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작품 역시 건축적인 것과 파인 아트를 오가며 그 경계선상에 있다고나 할까요. 선이란 라인일 수도, 경계를 뜻할 수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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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렬이 정글짐의 구조와 어릴 적 추억의 잔상을 구체화 한 신작전을 열었다. 정글짐은 철봉 따위가 종횡으로 얽혀 선들이 쌓이고 쌓인 공고한 직각 형태가 반복되는 모양인데, 이는 그의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소한 추억과 기억의 점들이 포개지고 이어지며 무수한 수직선과 수평선을 이뤄냈다. 신작명이 ‘조금 낮게 조금 높게’인 까닭이다. 윤상렬은 작은 차이가 지속된다면 훗날 큰 변화로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다.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11월 8일까지 경기 파주 갤러리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