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0.14 00:02
[리경]
빛, 어둠, 시간 등 비물질적 소재 가시화한 설치 작품
작고한 부친 향한 그리움 드러낸 빛기둥 작업 등 신작
11월 7일까지 예화랑
전시장이 어둡다. 아직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일까. 두리번거리던 찰나에 입구 맞은편 벽을 타고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수직으로 내리꽂는 하얀 빛기둥과 마주한다. 그 주변으로 안개가 자욱이 퍼질수록 빛줄기는 더욱 또렷해진다. 현실 초월적인 분위기에 흡사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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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리경(51)은 비물질적인 소재인 빛과 어둠에 천착해왔다. 그는 이를 두고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닌 것에 관심이 많다’라고 설명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화하기 위해 다채로운 소재와 방식을 활용한다. 특히 빛 특유의 특이성과 확장성에 착안해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등 양가적 개념을 은유적으로 연출해내는 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나란히 줄지은 세 개의 빛기둥은 각자 순환 주기가 달라 때론 시차를 두고 떨어진다. 동시에 환한 빛을 내뿜기도 하지만 어떤 빛이 밝을 때 다른 빛기둥은 아득히 스러져가기도 한다. 마치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생애가 다른 것처럼. “저 빛은 저의 삶일 수도, 아버지의 삶일 수도 있겠죠. 빛기둥의 순환 주기는 사람의 생이자 인연의 과정과도 같아요. 제 작업에서 가장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리경은 부친의 갑작스러운 작고를 계기로 빛기둥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작가 활동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아버지와 끝내 화해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에게 이는 영원한 아쉬움이자 작업의 동인(動因)이 됐다. 작가는 빛기둥이 ‘웜홀’이라고 상상하곤 한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아버지와 다시 만나 화해할 수 있기를 오늘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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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국내외 미술관과 파운데이션 위주로 전시 활동을 펼쳐온 그가 오랜만에 국내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천 개의 바람’을 열었다. 손으로 만질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바람. 그런 바람을 하나하나 세어 봤더니 천 개라고 그는 말한다. 이번 전시 타이틀 ‘천 개의 바람’은 셀 수 없는 바람을 낱으로 셈으로써, 비물질을 물질로 전복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1층 전시장에는 빛기둥 작업과 함께 그 빛을 가둬 시간성을 표현한 오브제가 설치됐다. 아크릴 좌대 위에 놓인 세 개의 황금빛 금속 상자에는 빛의 삼원색이 어려 있다. 투명한 에폭시 안에 빛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층 전시장에는 일본 긴자 메종 에르메스(2014)에서 선보인 대형 설치 작업을 축소한 듯한 자개 작업도 여럿 내걸었다. 삼면이 통유리인 긴자 에르메스 전시장 바닥을 자개 작품으로 깔아 빛의 공간을 연출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 빛의 공간을 축약해 벽에 걸어놓은 셈이다.
“이전에는 철저한 계산과 계획 아래 빛과 어둠을 표현하고자 했었어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죠. 만들어진 빛이 아니라 진짜 빛인 자연광과 맞짱 떠봐야하지 않겠나. 그러다 자연광에 완벽히 반응하는 재료를 탐색하다 고민 끝에 자개를 발견한 거죠.” 가로세로 45cm 크기의 정방형 오브제들에는 2mm 너비로 자른 자개를 빼곡하게 붙여 옅은 빛에도 일사분란하게 반응하는 자개의 물성이 그대로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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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미술평론가는 이번 전시 서문을 통해 “리경에게 작품은 일종의 빛을 드러나게 하기 위한 덫이다. 빛은 매순간 작품 표면을 스치면서 언뜻언뜻 자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세상의, 생명의 축도로 다가오며 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 리경의 방식이다”라고 했다. 11월 7일 서울 신사동 예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