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간에서 탄생한 붉은 캔버스… ‘엘리자베스 닐’展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0.09.22 18:11

아시아 최초 개인전 ‘고래의 뱃속에서’
10월 24일까지 서울 한남동 VSF

Captivity, 193.04x243.84cm, Acrylic on Canvas, 2020 /VSF
 
선혈로 뒤덮인 듯 강렬한 붉은 화면이 인상적인 엘리자베스 닐(Elizabeth Neel·45)이 빚어낸 형상은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부은 뒤, 붓질하고 인쇄하고 접고 스탬프를 찍고 말아서 끄는 등의 여러 과정을 거친다. 가장 마지막에는 나무틀로 늘린 후에야 그의 화면이 비로소 완성된다. 마치 밭을 경작하고 고르듯 제작한 작업들은 실제 미국 버몬트주 모리스 타운에 있는 농장 헛간에서 탄생했다.
 
닐은 자신의 붉은색을 두고 “갓 태어난 송아지를 적신 피와 진흙의 특정적 혼합 또는 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발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바랜 찰흙”이라고 설명한다. 신작 <감금(Captivity)>은 암적색과 진흥색 등의 붉은색 그리고 화사한 분홍과 탁한 장미색의 한 꽃다발을 연상한다. 흡사 알록달록한 부케 같은 이 회화를 통해 작가는 어두운 저녁 헛간에 홀로 남겨진 가운데, 지나가는 작은 동물들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촉촉한 진흙에 남기듯 캔버스 위에 흔적을 이들의 흔적을 표현했다. 
 
엘리자베스 닐 개인전 '고래의 뱃속에서‘ 전경 /VSF
 
그의 회화가 한국을 찾았다. 산수화 같기도 한 그의 추상화 신작이 공개된다. 닐의 첫 아시아 개인전 ‘고래의 뱃속에서’는 살롱 94와 VSF(베리어스 스몰 파이어스)의 첫 공동 기획전으로, 예상치 못한 색채와 자연의 기호들도 활짝 피어난 웅장한 풍경 4점과 작은 회화 8점을 소개한다. 전시 타이틀 ‘고래 뱃속에서’는 주인(신)을 섬기기 꺼리는 한 남자(요나)가 거대한 바다 생물에 의해 사로잡혀 감금되는 요나서(히브리 성서, 그리스도교 성경, 코란에 포함)에서 따왔다. 신화의 막을 한 겹씩 벗겨내는 듯한 그의 추상화에서 숨은 언어적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팬데믹 장기화 속에 작가가 새롭게 작업한 이번 신작들은 특히 그의 주변 환경을 묘사한 추상적인 화면이 더욱 잘 드러나며, 색상과 여백, 구성, 표식 등을 통해 닐 특유의 춤추는 것 같은 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닐 개인전 '고래의 뱃속에서‘ 전경 /VSF
 
작가는 저명한 미국 초상화가 앨리스 닐의 손녀이자 영화감독 앤드류 닐의 누나이기도 하다. 뉴욕 롱 아일랜드 스컬프처 센터와 누버거 미술관, 런던 사치 갤러리, 뉴욕 매리 분 갤러리, 로스앤젤레스 수잔 비엘미터, 제5회 프라하 비엔날레 등 전세계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뉴욕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코넬대학 허버트 F. 존슨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에 영구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는 10월 24일까지 서울 한남동 VSF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