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9.19 16:06
끊김 없는 ‘선’의 오브제 연작 ‘모노 시리즈’
“캔버스에 드로잉하듯 나는 공간에 그림 그리는 것”


“아무 설명도 써놓지 않고 그저 바닥에 덩그러니 놓곤 해요. 그러면 지나가던 관객들이 하나둘 멈춰 서선 이리저리 살펴봐요. 그러곤 이게 대체 뭐냐고 묻죠.” 바로 그거였다. 정그림(27)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보는 이가 궁금해하며 스스로 추측하고 탐구하게 하는 것. 정그림의 작품을 마주하면 거부할 수 없는 궁금증이 솟구친다. 디자인페어에 설치된 그의 작품에는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 소개글이나 캡션이 없다. 설명 없이 열린 해석의 여지를 주기 위함이다. 그의 작업이 언제나 상상력과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이유와 같다.
일반적인 가구 모양을 벗어난 정그림의 대표작 <모노> 시리즈는 끊김 없는 하나의 선으로 이뤄진 독특하고도 낯선 형태를 지닌다. 살아있는 것처럼 운동감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만져보고 체험하게끔 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과 소통하며 상호작용을 경험할 수도 있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추상적인 형상은 마치 종이에 끄적인 드로잉 선이 3차원 공간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 같다. 선 끝자락은 유연한 소재로 제작돼 사용자 마음대로 모양을 잡을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가구를 사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상상하고 이를 즐기길 바라는 작가의 무언의 메시지다. 다채로운 상상력을 기반으로 탄생한 만큼 의자, 조명, 스툴, 테이블 등 쓰임새도 다양하다.


이처럼 기발하고 개성 있는 작품은 미술계를 넘어 여러 분야에서 러브콜 세례를 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패션편집매장 ‘비이커’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서울 청담동 매장에 인스톨레이션을 선보여 패션씬에 눈도장을 찍었으며, 최근에는 대리석 수입사 ‘토탈석재’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대리석 작업을 서울 성동구 코사이어티에서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독일, 이탈리아, 중국 등지에서 먼저 주목받은 작가는 현재 서울에서 머물고 작업하며 국내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영감 넘치고 통통 튀는 작품처럼 행보 또한 범상치 않은 정그림을 만났다.

─국내외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해왔다. 최근에는 팬데믹으로 인해 활동 반경에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계약서까지 마무리해놓고 취소된 일들이 있어 아쉬움이 크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래도 올해 12월 파리에서 열리는 3인전은 예정대로 개최될 예정이다. 나를 포함한 한국 디자이너 3명이 모이는 자리다. 프랑스에서 유학했지만 정작 그곳에서의 전시는 처음이라 설렌다.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신작과 대표작을 출품한다. 신작은 행잉 작품으로 5미터 폭의 샹들리에인데, 모노 시리즈의 일환이다. 그리고 내년 3월 대구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원래는 10월이었지만 일정이 조정됐다. 그곳 전시장 공간이 너무도 좋아서 좀 더 여유를 갖고 작업에 임하기로 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꼭 내일모레 열리는 것처럼 지금부터 떨리고 기대된다.”

─끊김 없는 하나의 선으로 이뤄진 모노 시리즈가 대표작이다. 꼭 파이프를 꼬아 놓은 듯한 형상이 인상적이다. 고안하게 된 계기는.
“학생 때부터 늘 생각했다, ‘질문이 생기는 작품’을 하자고. 우리 일상에는 너무도 많은 사물이 있지 않나. 그냥 지나치고 버려지는 물건이 넘쳐나는데, 그 와중에 한 번쯤은 눈길을 사로잡고 물음표를 던지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궁금하도록 있도록 말이다.
모노 시리즈의 시작은 학교 과제물이었다. ‘앉을 수 있는 오브제’를 만들어오라고 했는데, 의자나 스툴이 아닌, 오브제라는 모호한 조건이다 보니 그 범위가 무한대였다. 의자라고 하면, 다리가 4개에 등받이가 있어야 한다는 이 조건을 벗어나고 싶었다. 과제를 준비하며 재료를 물색하다가 철물점에서 고무 튜브를 발견했다. 건물을 지을 때, 파이프나 전선을 감싸고 매립하는 용도더라. 이를 사와 작업실 바닥에 놓아뒀다. 두껍고 긴 튜브가 엉켜있는 형상이 꼭 끄적인 드로잉선 같아 보였다. 나는 캔버스 대신 공간을 도화지로 삼았던 셈이다.”
─선으로 이뤄져 있어 작품이 굉장히 유연하게 다가온다. 철사 꼬듯이 마음대로 변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물결치듯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사실 스틸로 견고하게 모양을 잡은 뒤 이를 실리콘으로 부드럽게 감싼 거다. 말랑말랑한 재료의 물성을 살리고 싶어서 선 끝자락에는 스틸이 들어있지 않아 만지면 보드랍다. 저렇게 함으로써 리드미컬해지고 꼭 살아있는 것처럼 생명감이 깃든다. 선의 끄트머리는 실제 나도 ‘꼬리’라고 부르는데, 그 꼬리는 원하는 대로 모양을 잡아 둘 수 있어 재밌다. 꼬아서 쌓아놓거나 길게 늘어뜨릴 수도 있다. 이러한 재미를 통해 사용자가 많은 것을 상상하길 바란다.”


─최근에는 대리석을 활용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6월, 엔에이(N/A) 갤러리에서 선보인 대리석 의자 <Naga> 이후 현재는 코사이어어티에서 대리석 테이블 등을 전시하고 있다. 쇠와 돌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소재다. 대리석을 택하게 된 이유는.
“지난해 설악산에 올랐다가 돌의 매력에 푹 빠졌다. 등산로를 오르며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거친 자연석을 마주하니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는 동시에 바위에 매혹됐다. 돌에는 퇴적되고, 침식된 흔적들과 지각변동이 왔을 때 요동친 흔적까지 모두 기록돼 있다. 생명력이 없는 광물이라고 하지만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시간을 담고 있는 대리석이 생명체처럼 느껴지더라. 이처럼 자세하고 세밀하게 자연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사물이 또 있을까 싶다. 다만, 가공이 쉽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 통석이 아닌, 판재여야만 하고 밀도나 견고함이 일정치 않아 커팅하는 데 제한이 있다. 그래도 자연이 준 산물이란 점에서 참으로 흥미롭고 재밌는 소재다.”

─가구(오브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생활 풍경에 녹아들거나 독보적인 감성으로 공간 분위기를 주도하는 경우 말이다. 실제로 정그림 작가의 작품은 공간 분위기를 반전하고 전환하는 데 유독 그 역할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공간은 내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오브제와 스페이스 디자인을 전공했고,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럽의 수많은 건축물을 많이 보고 경험했다. 학생 때도 가장 좋아하는 수업은 실내디자인, 건축이었다. 언제나 상상에서 작업이 비롯된다고 했는데, 나는 늘 특정 공간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곳에 놓이면 어떨까를 떠올리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작품이 지닌 에너지의 범위는 단순히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단일 피스를 넘어 그 작품이 놓일 공간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도 구체적으로 한다. 아무개 공간에 놓인다기보단 어느 코너에 어떻게 놓이겠다를 상상하는 식이다. 공간을 도화지로 삼은 게 모노 시리즈가 탄생한 배경이다. 캔버스에 그리듯이 공간을 내 작품으로써 그림을 그려 채우고 완성하고 싶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작가의 오브제를 두고 조각 혹은 작품 혹은 가구 등으로 규정짓는 게 무의미하다고들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도 고민이 많았던 지점 중 하나다. 아트퍼니처라고는 해도 내 작업이 실생활 용도보다는 전시에서 선보이는 게 대부분이고, 그렇다고 조각이라고만 하기엔 가구로의 기능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내 작업이 예술인지 디자인인지 아무리 고민하고 그걸 설령 스스로 정한다한들 무의미하겠더라. 그래서 현재 결론은 보는 이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거다. 나는 그런 고민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열심히 작업에 집중하려고 한다. 때론 상업적으로, 때론 예술적으로.”
─학교 졸업 후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한 지 3년가량 됐다. 앞으로의 가능성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걸 미래에 하는 게 꿈이다. 신기하게도 지금까지는 내가 상상한 대로 이뤄져 왔다. 국제적인 아트페어와 디자인페어에 출품하고, 해외에서 전시하고, 브랜드와의 협업같이 말이다. 물론 세계적인 갤러리에서 솔로 전시를 하고 더 큰 럭셔리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지만, 이는 현재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그런데 이런 걸 넘어서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꿈의 폭이 무한대로 펼쳐지는 기분이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일이 미래에 벌어질지 너무나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