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9.11 18:30
재료 물성 살려 있는 그대로 구현한 화면(畫面),
보는 이에게 열린 결말 같은 사념의 장(場) 선사…
개인전 ‘숨,결’, 10월 24일까지 부산 데이트갤러리

울렁이는 강물을 배경 삼아 그 앞으로는 갈숲이 너울거리고 저 너머로 석양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이내 선선한 바람이 몸을 휘감고 스쳐 가니, 영락없이 야외에서 즐기는 망중한이다. 형태도 이미지도 없는 김근태(67)의 희뿌연 재색 화면에서 호화로운 풍경이 읽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김근태는 자연에서 가져온 재료의 물성을 져버리지 않고 살리고자 하며, 질료 고유의 속성을 존중하는 데 뜻을 두고 평생의 화업을 이어왔다. 수수한 그의 그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작가의 성정이 담긴 덕분일 테다. 그의 작업이 오색찬란한 색채나 화려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오로지 담박한 색감만으로 궁극의 충만함과 그득함을 이루는 이유다.
일견 지극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서양의 미니멀리즘으로만 보일 수 있어도, 그 바탕에는 언제나 한국적인 정서가 자리한다. 김근태는 돌의 속성을 재현하기 위해 유화물감에 석분(石粉)을 접착제와 섞어 광목 캔버스와 융합해 독자적인 매체를 빚어내기에 이르렀다. 우리 고유의 정신성을 실현하기 위해 수 없는 실험 끝에 정착하게 된 것이 바로 돌가루였다. 불상의 거슬거슬한 질감, 분청사기의 질박한 표면과 소박한 문양을 평면에 일폭으로 옮긴 셈이다. 흰색이지만 희지만은 않으며 누렇지도 않은 색, 과시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으며 은근히 배어나는 미색이 화면 밖으로 침윤한다.


그의 작업 과정 또한 질료와 소통하고 주파수를 맞추며 서로의 접점을 더듬어 찾아가는 흐름과 다르지 않다. 묽은 재질의 물감을 캔버스 위에 부어 질료의 상태를 주시하며 상하좌우로 움직이길 거듭하는데, 이렇듯 끝없는 중첩의 시간을 관통한 캔버스에는 작가의 숨과 결이 중첩된다. 그러나 숨결에는 형태가 없는 법이다. “모든 작업 과정은 궁극적으로 제 흔적과 체취는 완전히 지워내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물성을 살려 화면 그 자체만을 남기기 위함입니다.” 재료의 물성이 본디 지닌 순수성을 최대한 헤치지 않고 화면에 있는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김근태가 지향하는 바다.
정작 그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형태가 없는 비물질적인 정신세계인데, 어째서인지 김근태의 그림에는 읽을거리와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그의 회화를 감상하는 데에 논리나 이성은 필요 없으며, 어려운 독해 없이 그저 보는 이에게 열린 결말과 같은 사념의 장(場)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재료와 소통하는 중에 우연히 발아한 듯한 흠집이나 얼룩은 그림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물질의 속성을 다루는 작가 김근태의 개인전 ‘숨,결’이 부산 해운대구 데이트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홍콩 화이트스톤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큰 호응을 받은 돌가루 연작을 비롯해 오늘날 돌가루 시리즈의 시초가 된 1990년대 후반 작업된 구작들도 함께 내걸렸다. 분청을 평면화하는 데 천착했던 당시의 그림에서부터 올해 그린 신작까지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작업과는 구분되는 세찬 붓질과 강렬한 컬러가 이채로운 구작을 통해 그의 작업세계에서 반전(反轉)을 경험하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비어있지만 공허하지 않은 비움의 세계와 그 근원을 건드리고 표출하는 정신의 경지를 회화로 표현해온 김근태는 지난 2년간 독일, 일본, 베트남, 홍콩을 오가며 활발히 전시를 이어오며 세계 컬렉터들에게 인상 깊은 눈도장을 찍었다. 특히 지난해 12월 베트남국립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베트남 현대미술교류’전(展)을 통해 박서보, 이우환을 잇는 차세대 단색화 화가로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10월 24일까지 월~토 운영된다. (051)758-9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