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8.27 10:00
◆[최울가의 아뜰리에 일기]는 작가의 작품과 작업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일상의 기록을 소개하는 코너로 Art Chosun에서 매주 2회 (화,목) 총 6주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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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작업실실 위 맨하튼 애비뉴 1107호 챔피언 커피숍에 앉아 끝없는 추상에 대한 도전과 편견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하던 걸 다 멈출 수 있을까 ? 지금까지의 낯익은 시선들을 버릴 수 있을까? 김환기 선생님은 과감히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한국 추상미술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버릴 수 있는 용기, 버린 것마저도 더 큰 예술품이 되어버린 그의 그림들. 그 어떤 추상도 그렇게 철학이 깃든 추상미술은 한국에 단 하나뿐인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또 두렵다. 그냥 단순히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수년 동안 머리에서 맴도는 주제는 내가 생각하던 그것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유럽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다. 말도 필요 없는 한국인이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리기에 너무나 주위 환경에 각인된 것이 많다. 5년, 10년은 경제적 곤란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수하가 뉴욕에서 겪은 경제적 곤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가득 매운 전시장의 그림을 단돈 2만 불에 다 판 것이다. 거의 50점에 가까운 푸른 점과 노란 갤럭시 추상들을 아마 빈센트 병원비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신장염으로 수술한 그 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김향안 여사 또한 얼마나 통곡했던가는 (작품을 샀던 사람은 필라델피아 한인회장도 했다는) 후일 뉴욕의 한인으로부터 들었다.
그림의 벽을 무너뜨릴 때 숟가락 같은 작은 도구로 조금씩 허물다가는 죽기 전에는 힘들다. 불도저다.
그림의 벽을 무너뜨릴 때 숟가락 같은 작은 도구로 조금씩 허물다가는 죽기 전에는 힘들다. 불도저다.
그 웅장한 도구로 완전히 제압하여 부셔야 한다. 수하는 과감히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나 또한 얼마나 그 길을 가길 꿈꾸었던가?
얼마 전 내가 즐겨마시던 50년 동안의 커피 스타일을 일순간에 바꿨다. 원래는 우유를 듬뿍 넣고 설탕을 적당히 넣은 달콤하고 그윽하고 부드러운 향이 나는 커피였는데 내 몸에 콜레스테롤과 고지혈이 과다하다 하여 단 음식, 트랜스 지방이 풍부한 튀김, 고기, 밀가루 음식, 과자류, 인스턴트 음식, 탄산음료를 급히 줄여야 할 때가 있었다. 그중 커피도 단맛이 진한 것부터 줄여야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사실 커피는 통역관의 아버지를 둔 덕에 미국 맥스웰 커피가 집에 늘 있었고 덕택에 그냥 설탕의 단맛으로 마시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똑 같은 톤으로 마셨으니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도 마침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일순간에 끊고 블랙으로 마셨는데 너무도 쓰고 맛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마시던 그 커피 맛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맛없는 블랙을 마셨다.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실까 보다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오늘만 참자하면서 맛없는 커피를 거의 억지로 마셨다. 정말 2달 반을 마시면서 더디어 커피 맛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히려 단 커피는 못 마시게 됐지만 결국 바꾸고야 말았다. 담배도 마찬가지로 18년 전에 단 한 번에 끊었다. 독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Play Series. 블랙 앤 화이트를 과감히 버리고 추상의 길을 들어 설 수가 있냐 말이다. 나의 영원한 우상 김환기 선생님처럼.
얼마 전 내가 즐겨마시던 50년 동안의 커피 스타일을 일순간에 바꿨다. 원래는 우유를 듬뿍 넣고 설탕을 적당히 넣은 달콤하고 그윽하고 부드러운 향이 나는 커피였는데 내 몸에 콜레스테롤과 고지혈이 과다하다 하여 단 음식, 트랜스 지방이 풍부한 튀김, 고기, 밀가루 음식, 과자류, 인스턴트 음식, 탄산음료를 급히 줄여야 할 때가 있었다. 그중 커피도 단맛이 진한 것부터 줄여야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사실 커피는 통역관의 아버지를 둔 덕에 미국 맥스웰 커피가 집에 늘 있었고 덕택에 그냥 설탕의 단맛으로 마시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똑 같은 톤으로 마셨으니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도 마침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일순간에 끊고 블랙으로 마셨는데 너무도 쓰고 맛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마시던 그 커피 맛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맛없는 블랙을 마셨다.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실까 보다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오늘만 참자하면서 맛없는 커피를 거의 억지로 마셨다. 정말 2달 반을 마시면서 더디어 커피 맛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히려 단 커피는 못 마시게 됐지만 결국 바꾸고야 말았다. 담배도 마찬가지로 18년 전에 단 한 번에 끊었다. 독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Play Series. 블랙 앤 화이트를 과감히 버리고 추상의 길을 들어 설 수가 있냐 말이다. 나의 영원한 우상 김환기 선생님처럼.
지금까지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자유를 누려왔다면 이제는 물리적 현상에 의한 수학적 놀이에 빠져보고 싶다. 하지만 이게 다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내가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브루클린 작업실 벽만 보면서 기다림의 백미를 씹을 수밖에. 어제 그리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올 수 있기를 기다린다. 몇 일 전까지만 해도 인디언 썸머라고 후덥지근했는데 하루아침에 추워졌다. 모든 게 가고 오는 물리적 이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남의 나라 창고 작업실에서 뿌옇게 떨어지는 새벽빛 천정을 바라보니 어린 날 학교 안 가고 집 밑에서 울면서 땅바닥에 나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다가 집 쪽으로 올려다보며 울다가 또 그리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끝을 맺었던 기억들이 문득 생각나 혼자 웃어본다. 그때 훗날의 그림쟁이가 될 징조가 있었던 것일까? 그 시대 서슬이 시퍼런 유신 때에 아무것도 없는 놈이 그림 유학을 갈려고 했으니 참으로 황망한 일이 아니었던가? 이제 맨땅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오기처럼 생긴다.
애드가 앨런 포, 보들레르를 흠모하고 고갱과 베이컨을 마음에 두었던 어린 시절. 무작정 베토벤을 듣고 브람스, 차이코프스키를 들었던 그때 예술은 하나의 신과 같았다.
내가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브루클린 작업실 벽만 보면서 기다림의 백미를 씹을 수밖에. 어제 그리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올 수 있기를 기다린다. 몇 일 전까지만 해도 인디언 썸머라고 후덥지근했는데 하루아침에 추워졌다. 모든 게 가고 오는 물리적 이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남의 나라 창고 작업실에서 뿌옇게 떨어지는 새벽빛 천정을 바라보니 어린 날 학교 안 가고 집 밑에서 울면서 땅바닥에 나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다가 집 쪽으로 올려다보며 울다가 또 그리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끝을 맺었던 기억들이 문득 생각나 혼자 웃어본다. 그때 훗날의 그림쟁이가 될 징조가 있었던 것일까? 그 시대 서슬이 시퍼런 유신 때에 아무것도 없는 놈이 그림 유학을 갈려고 했으니 참으로 황망한 일이 아니었던가? 이제 맨땅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오기처럼 생긴다.
애드가 앨런 포, 보들레르를 흠모하고 고갱과 베이컨을 마음에 두었던 어린 시절. 무작정 베토벤을 듣고 브람스, 차이코프스키를 들었던 그때 예술은 하나의 신과 같았다.
오랜 시간 고통도 고독도 참아낼 수 있었지만 두 번의 좌절이 나에게 준 자존의 상처는 너무 컸다. 그림이 큰 틀에서 바뀔 때 그렇게 목적 없이 방황하고 아파했던 기억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두려움이 찾아온 것 같다. 이제 어쩌면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인데 그 갈림길에 또다시 서게 된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그 길을 선택지 못 할지도 모른다. 미래에 무능한 작가로서의 여정을 마칠지라도 그것은 하늘의 뜻이지 나의 의중과는 상관 없는 신의 농간일지 모른다는 생각. 혼자만의 생각, 혼자만의 과욕 적 사고로 자신의 한계를 너무 후하게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 햇살은 한없이 푸르른데 나에게 달콤한 향기를 불어 넣어줄 사람 없고 지나가는 폴란스키 사람들의 뜻 모를 소리에 귓가에 묘미스러울 뿐이다.
가을 햇살은 한없이 푸르른데 나에게 달콤한 향기를 불어 넣어줄 사람 없고 지나가는 폴란스키 사람들의 뜻 모를 소리에 귓가에 묘미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