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울가의 아뜰리에 일기④] 나의 정신적 지주 오영재 선생님을 생각하며

  • 최울가 (서양화가)

입력 : 2020.08.20 10:57

◆[최울가의 아뜰리에 일기]는 작가의 작품과 작업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일상의 기록을 소개하는 코너로 Art Chosun에서 매주 2회 (화,목) 총 6주간 연재됩니다.
 
옛 뉴욕 작업실 전경 ©최울가
 
나의 영원한 정신적 스승, 故오영재 선생님은 “작가는 그림 앞에 서지 말고 그림 뒤에 숨어 있어야 해. 예술가는 마라톤과 같은. 긴 여정을 뛰는 것이지. 나는 저기 결승점이 보이네” 라고 하시던 말씀이 35년이 지난 지금도 쟁쟁하다. ‘그렇다 과연 나는 그림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숨어 있었던 것이 맞을까? 그리고 나의 마라톤 여정은 어디쯤 뛰고 있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예술가는 42,195km를 뛰는 마라토너.
 
여의도 광장을 출발해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42,195km를 누가 먼저 도달할 것이냐?  5km, 10km, 20km, 30km 달리고 또 달린다. 예술가는, 특히 화가는 마지막 끝인 스타디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가 빠르게 속도를 내서 뛴다면 1km도 못 가서 지쳐서 더 이상 뛰지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Step by step. 한결같은 걸음으로 가지 못한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누군가가 빨리 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속도를 낸다면 곧 뒤처지고 만다. 그 시간에 도착 하지 않아도, 몇 시간이 걸려도 누가 탓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제 10km 지점에서 욕심을 내어 서둘러 속도를 내는 예술가들을 보면 열광한다. 하지만 긴 여정의 코스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곧 숨이 차고 느려질 것이고 사람들의 환호도 사라질 것이다. 15km에서 속도를 내는 사람, 20km에서 혹은 30km에서 빨리 뛰어 보지만 금세 지치고 말 것이다. 올림픽 때 마라토너들을 보면 단 한 번도 속도를 과하게 내어 뛰어가서 챔피언이 된 하나도 없다. 예술에서의 마라톤은 마지막 스타디움 앞에서는 육신이 뛰는 게 아니고 그때부터는 영혼이 뛰는 것이다.
 
누가 조금 빨리 뛴다고 조바심낼 필요가 없다. 수많은 사람이 모두 다 결승점에 도달할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다. 메인 스타디움의 결승을 향해 들어갈 수 있는 영혼은 하늘이 만든다. 거기까지 못 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다. 최선을 다했고 남들보다 조금 빨리 뛰어서 환호를 받은 사람도 체력이 따라주지 못해서, 의지가 약해서, 친구들과 재밌게 놀다가, 너무 덥고 지쳐서 등 수만 가지의 사정으로 그냥 뛰어봤고, 참가해 본 것으로 만족하는 그 시간이 올 것이다. 돈이 있어도 화려한 간판이 있어도 예술가에게 마라톤은 소용없는 과유불급이다. 그저 한결같이 뛰다 보면 마지막 관문은 하늘이 점지해준다. 조금 먼저 갔다고 뒤늦게 왔다고 우쭐댈 필요도 자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예술가들이 뛰어야 하는 긴 여정의 마라톤인 것이다.
지금 당신은 몇 킬로미터 지점에서 뛰고 있습니까? 앞에 가던 사람 따라오던 사람 15km 후면 다 바뀌어 있을 것이고 30km 후면 알 수도 없는 사람이 내 앞에 뛰고 내 뒤에서 뛰어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큰 예술가는 하늘이 점지해주는 일이니, 하늘에 맡기고 자기 페이스대로 즐기면서 뛰는 게 진정 예술가의 마라토너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지금 뛰고 있는 지점이 몇 킬로미터냐고 묻는다면 신당동 떡볶이집 앞 32km 300m 지점을 지나고 있는데 내 앞에 이 xx, 김 xx 내 뒤에는 말 많은 예술가 문xx, 윤 xx, 김xx도 있네요. 파리에서 온 이 xx도, 미국에서 하는 일 없이 소일하시다가 온 분도 있고, 나하고 같이 뛰는 사람은 뉴욕에서 온 김씨, 국내파 안씨, 허씨도 있네요. 앞서 뛴다고 질투심 내어 달리다 보면 쉬이 지쳐서 더 뛰지 못 할 것이고, 멀리 뒤늦게 온다고 자만 말고 같이 스타디움까지 뛰다 보면 어느덧 해는 저물고  관중도 없고 사람도 없는 캄캄한 밤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100등 한 사람도, 1000등 한 사람도, 20등 한 사람도 잘 뛰었다고 하면서 다들 혼자 집으로 돌아가겠죠.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긴 여정은 마라톤과 흡사하여 자기의 호흡과 걸음을 조절해서 달릴 수 없다면 긴 여정은 한낱 참가했다는 것으로 막을 내릴 수 있겠지요. 같이 뛰는 작가 토너님들 오늘도 힘 빼지 마시고 신당동 떡볶이집 앞을 무사히 지나가시기를 바라고 간혹 뛰기 힘들어하는 동료들에게도 용기의 한 마디 "힘내서 같이 뜁시다" 이렇게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몇 킬로미터 쯤  달리고 있습니까?
오 선생님 그때 말씀하시던 결승점이 나에게도 멀리 눈에 들어오네요 
마라톤도 경쟁도 없는 그곳에서 편안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