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7.20 16:32
[필동 팩토리(Pil-Dong Factory)]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고단한 숙명의 예술가들. 이러한 독자적인 작가 정신은 이들을 일컫는 대명사였다. 그러나 요즈음 생각과 목적이 비슷한 예술가들이 모여 협업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프로젝트 팀, 아티스트 컬렉티브, 크리에이티브 그룹 등 다양하게 일컬어지는 예술가 집단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소위 ‘크루 문화’라고 명명되는 이러한 흐름은 과거 힙합 신에서 래퍼들에게 비트를 만들어줄 프로듀서가 필요하고, 무대에서는 완성된 비트를 틀어줄 DJ가 필요하기에, 음악적 취향과 방향성이 잘 어우러지는 몇몇이 모여 하나의 무리를 형성한 것에 빗대어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영역의 섞임 속에서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가는 예술가 집단을 만나본다. [편집자주]

중세의 길드나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공방을 뜻하는 보테가(bottega)부터 오늘날과 같은 개인 작업실에 이르기까지 ‘아틀리에’라고 일컫는 작업 공간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가장 오래 머무는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주변인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구심점이다. 지난해 서울 중구 필동에 들어선 박경근 작가의 스튜디오는 옛 시대처럼 사제나 상하 관계가 아니라 의미 있는 친분으로 얽힌 각 분야 전문가들이 ‘공간의 협업’을 이뤄내고 작업의 시너지도 추구하는 특별한 장소다. 또 마치 작은 보테가처럼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판매하는 매장도 있다. 예술가와 디자이너, 엔지니어가 한 공간에 모여 창조적 영감과 현장의 테크닉을 교류하는 ‘필동 팩토리’를 소개한다.

창조적 관계를 만들고, 그 의미를 더해가는 공간
서울 남산 북쪽 기슭 아래, 필동의 어느 오르막길 끝자락. 가리는 데 없이 탁 트인 유리 통창, 외벽의 그래피티가 인상적인 3층 건물이 나온다.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 박경근 작가가 지난해 문을 연 필동 팩토리. 박 작가의 거주 공간이자 작업실, 그의 친구인 가구 디자이너 조재원 작가의 작품을 주로 선보이는 가구 쇼룸 썸 컬렉티브(SOME Collective), 그리고 다양한 설치물을 만드는 제작소 아주정밀기계가 사이좋게 들어서 있는 곳이다.
원래 박경근 작가는 을지로에 작업실을 두고 있었으나, 일대가 ‘힙지로’라 불리면서 임차료가 점차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업실을 새로 꾸리기 위해 동네를 물색하다가 필동에서 지금의 공간을 발견했다고 한다. 6개월가량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3층 건물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그는 이 공간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 ‘파트너’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을지로 정밀기계 장인 송병익 대표와 2년 전 만나 친분을 쌓아온 조재원 디자이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송 대표와 조 작가는 예산의 한계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채우지 못한 건물 구석구석을 저마다의 개성이 묻어나는 조형 언어로 채우고 다듬었다. 레노베이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따로 있었지만 이들 역시 철재, 목재를 다루는 자신들의 전문 역량을 슬기롭게 보탠 것.


협업 플랫폼으로서의 현재와 미래
그렇게 완성한 필동 팩토리의 2층은 박경근 작가의 작업실인 동시에 조재원 작가와 종종 대화나 아이디어를 나누는 소통의 공간이다. 둘 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언뜻 성격이 다른 것 같아도 잘 통한다.
박경근은 주로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원형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청계천 메들리>(2010), <철의 꿈>(2014), <군대: 60만의 초상>(2016) 등으로 미술계와 영화계에서 동시에 주목받는 작가. 작품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그의 작업실도 건물에 숨겨져 있는 골조나 리모델링 과정에서 보강된 자재가 거의 가공 없이 노출되는 인더스트리얼 분위기로 꾸몄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주거 공간인 3층과 더불어 곳곳에 조 작가와 송 대표의 흔적이 묻어 있다. 예컨대 깔끔하면서도 운치 있는 주방 가구라든지 반드시 좌우 발을 교대로 딛어야 하는 묘하게 깜찍한 계단 등은 조 작가의 ‘작품’이고, 건물 앞 철제 간판은 송 대표의 손길이 닿았다.

1층에 송 대표의 제작소와 나란히 자리 잡은 썸 컬렉티브는 디자인 가구와 예술 작품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조재원 작가의 친형인 조윤종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2008년 LA에 J1스튜디오를 설립해 가구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3년 전 한국으로 들어온 조 작가의 작품은 기본 모듈을 통해 자유로운 변형과 확장이 가능한 실용성을 갖추었다. 거기에 나무 소재가 지닌 따뜻함을 모던하게 잘 풀어낸 담백한 미학을 품고 있다.
쇼룸에는 조 작가의 가구뿐 아니라 강성 등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 그리고 디르크 플라이슈만(Dirk Fleischmann), 타이드 오닐(Taidgh O’neill)을 비롯해 박경근 작가의 예술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어 작지만 알찬 전시장 역할을 한다.

필동 팩토리는 그룹 명칭도 상호도 아니지만 ‘따로, 또 같이’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신뢰와 공감대를 만들어준, 협업의 뿌듯한 첫 결과물이다. 박경근 작가는 현재 구상 단계라 구체적인 계획은 밝힐 수 없지만 조재원 디자이너, 송병익 대표와 꾸려갈 창조적 협업의 영역을 좀 더 확장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연금술사 같은 송 대표와 늘 아이디어와 해결책을 의논할 수 있기에 두 작가는 더 든든하고, 의욕이 솟을지도 모르겠다. 현대미술을 하는 예술가, 가구 디자이너, 엔지니어의 삼각 구도가 일궈낸 공간의 미학이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진화할지, 어떤 흥미로운 창조물을 탄생시킬지 궁금해진다.

본 기사는 아트조선x스타일조선 공동 기획 일환으로, <스타일조선일보> 2020년 7월호(207호)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