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7.17 18:38
[신모래]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에서 회화로의 매체 확장
핑크색으로 사로잡은 확고한 밀레니얼세대 팬덤
개인전 ‘너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연인 그리고 적’
8월 14일까지 서울 청담동 노블레스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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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누구나 공감하고 경험해본 감정이자 일상일 테다. 이 익숙하고도 진부한 소재를 매혹적인 비일상으로 그려내는 신모래(32)는 밀레니얼세대 사이 확고한 팬덤과 마니아층을 형성한 스타 작가다. 그의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은 접했을 정도로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리트위트되고 바이럴되며 다양한 형태로 소비돼 왔다. 또한 삼성, 호가든, SM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분야의 다채로운 기업과 협업한 것도 유명세에 한몫했다. 달콤하게 때로는 쓸쓸하고 공허하게 연인의 일상을 밤거리에 번진 네온사인을 연상하는 핑크색으로 물들인다. 이 오묘한 ‘신모래 핑크’는 보는 이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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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잘 알려진 그가 회화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2018년 이후 2년 만에 마련된 개인전 <Your Only Lover, Friend, Enemy: 너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연인 그리고 적>에서 작가의 드로잉과 페인팅을 최초 공개했다. 핑크색을 걷어내고 담백한 검은색 콩테로 그린 드로잉을 메인 작품으로 내걸었다.
그림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글이다. 작업의 시작은 언제나 글이다. 이번 신작도 다르지 않다. 편지글에서 피어난 기억이 화면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자꾸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저는 그 기억을 소거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죠. 반면, 글을 쓸 때면 도리어 그 기억을 또렷이 각인시키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글부터 먼저 쓰며 작업의 바탕을 다지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해 자유로워지는 심정이랄까요.”
디지털과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전시장으로 발을 내딛음으로써 국내 미술계 메이저리그로 진입하려는 그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회화 그다음 작품은 영상이 될 거라고 그는 말했다. 다매체를 바탕으로 운신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신모래를 만났다. 전시는 8월 14일까지 서울 청담동 노블레스컬렉션에서 열린다.
─전시장 입구 벽을 가득 채운 긴 편지글이 눈에 들어온다.
“글쓰기를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좋아하고 자주 한다. 시상 떠오르듯 문장으로 머릿속을 스치는 것들을 버릇처럼 노트에 적곤 한다. 그게 곧 작가노트인 셈이다. 이번 작품들은 편지글을 화면으로 옮겨놓은 거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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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타이틀이 예사롭지 않다. ‘너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연인 그리고 적’, 무슨 뜻인가.
“전시타이틀을 염두에 두고 쓴 글귀는 아니었다. 작별 인사를 담은 편지글을 쓰다가 저 문장이 떠올랐다. 연인이란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지 않나. 사랑하기도 하지만 미워하기도 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관계더라. 이를 ‘친구이자 연인 그리고 적’이란 하나로 콕 집어 정의내릴 수 없는 다층적인 관계로 정의내리고 싶었다. 적이란 게 부정적인 사이라기보단 치열하게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는다는 의미다. 반면, 작품 속 남녀는 연인처럼 보이지만 친구 또는 가족일 수 있고 보다 깊이 들여다보면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와의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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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만 100점이 넘는다. 직접 손으로 그린 드로잉은 처음 선보인다.
“지금껏 기억을 소재로 디지털 작업을 했다면, 이번에는 머릿속에 바로바로 떠오르는 느낌을 종이에 즉흥적으로 옮기고 싶었다. 어떤 기억은 또렷한 반면, 어렴풋이 흐릿한 기억도 있다. 지금까지의 디지털 작업이 정지화면이었다면, 드로잉에서는 운동감이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감상을 구현하는 데 드로잉만한 게 없더라. 거칠고 투박할 수 있어도 찰나의 움직임과 원초적인 손맛을 살리고자 했다.
원래는 70점가량 작업했는데, 전시장을 좀 더 풍성하게 메우고 싶어 30점을 추가로 그려 걸었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포옹, 그저 습관처럼 하는 포옹, 위로의 마음을 담은 포옹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감정, 잊고 있던 감정, 숨기는 감정 등을 108점에 담았다. 벽에 붙이면 평면적이고 정적인 것 같아 와이어로 전시장 한가운데에 매달아 입체적으로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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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플라스틱 꽃을 샀어. 튤립으로. / 알지, 나의 귀여운 고양이들 때문에 튤립은 집에 놓을 수 없는 것. / 아무튼 이건 튤립보다 더 튤립 같아. 영원히 시들지 않겠지? / 내가 죽고 나서도 말야. 영영 생생하고 아름다울 거야. / 아무도 썩어 거름이 되도록 땅에 묻어주지 않을 거야. (작가노트 중)
─그림에도 글에도 튤립이 자주 나온다.
“내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 튤립은 내게 그런 존재다.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산다. 어느 날 튤립을 키우고 싶단 생각을 문득 했는데, 알아보니 고양이에게는 해로운 꽃이더라. 키우려야 키울 수 없어서 그런지 더욱더 갖고 싶었다. 그래서 튤립 조화를 샀는데, 이 진짜 같이 생긴 플라스틱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점점 오싹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사실적이라 오히려 불쾌감이 드는 지점 말이다. 마침 튤립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다.
편지글에 플라스틱 꽃을 샀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이별을 어떻게 견디고 삭이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시드는 게 무서워 플라스틱 꽃을 사는 세상인데, 기억도 이별의 아픔도 그렇게 영원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듯 내가 가질 수 없는 튤립, 그게 곧 사랑일 수도 떠나보낸 연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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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괄호눈이 특징이다. 신작에서도 괄호 모양의 눈이 보인다. 표정을 읽을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감정이 담긴 것 같다.
“눈이란 곧 시선이다. 시선이 있으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감상이 너무도 분명히 드러난다. 열린 결말처럼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는 그림이 좋다. 분명한 것을 피하고자 괄호눈을 고안했고 지금까지도 고집하고 있다.”
─밤거리 네온사인이 반사된 듯 빛나는 ‘신모래 핑크’가 화면 전체에 부드럽게 스며든 듯한 특유의 스타일로 팬덤과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핑크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재밌게도 핑크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색은 아니다. 핑크 이야기를 하자니 자연스레 작가로 전향하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작품 활동이란 건 나와는 아주 먼 얘기로 느껴졌던 때다. 당시 태블릿 PC로 혼자 이것저것 낙서하는 게 취미였다. 그림을 그려놓고 포토샵으로 이 색깔 저 색깔을 눌러보다가 파란색을 얹었더니 우울감이 그림을 뒤덮더라. 파란색을 우울한 색이라고들 하지 않나. 그렇게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표현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러다 핑크를 얹었더니 알게 모르게 묘한 분위기가 배어나는 게 싫지 않았다. 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핑크를 전개해왔다. 화려하지만 쓸쓸한 그 지점이 좋다. 아, 딱히 좋아하는 색은 없다. 평소에는 무채색 옷을 즐겨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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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개인 기록용으로 소셜미디어에 올린 그림이 리트위트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강렬한 핑크빛 이미지는 여전히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일상적인 풍경을 눈을 사로잡는 핑크색으로 물들였다는 점에서 끌리지 않았을까. 특히 인물들이 괄호눈으로 표정이 없다 보니 보는 이가 얼마든지 마음 가는 대로 감상할 수 있고 자신에 대입하기 쉬워하는 것 같더라. 감정적으로 거리감이 멀지 않아 누구나 즐기기 좋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러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이어오고 있다. 도전하고 싶은 욕심 나는 분야가 있다면.
“게임을 무지 좋아한다. 요즘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 푹 빠져 있다. 이외에도 가리지 않고 온갖 종류의 게임을 다 섭렵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게임 회사와 협업해보고 싶다. 보통 총싸움 같은 게 주류이다 보니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지만.(웃음) 패션필름에도 욕심이 있다. 패션브랜드마다 캠페인이 있는데, 그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제작해보면 색다르지 않을까.”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준비 중인 작업이 있다면 귀띔해 달라.
“그림은 시퀀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 장면 앞뒤로도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렇다면 그다음 단계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영상이겠더라. 올해는 영상 작업물을 내놓을 계획이다. ‘gif’ 형태의 작품을 2016년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선보였는데 영상으로 가는 과도기였던 셈이다. 온라인 전시를 내가 직접 꾸려 공개할 생각이다.”
나는 지금 너의 이불이랑 베개를 떠올리고 있어.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것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거든. / 아무튼, 건강하게 지내. 안녕 / 추신. 멋대로 편지를 마무리해서 미안해. 알잖아. 이게 나란 걸, 너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연인 그리고 적. (작가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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