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6.02 18:18
[이정민]
숫자 아닌, 모호한 언어로 지정된 효과 값의 미묘한 차이 활용해
상대적인 시간성, 감정 등을 영상화…
개인전 ‘re, presentation’展, 3일부터 청담동 g갤러리
“움직임은 ‘위에서’ ‘왼쪽에서’, 속도는 ‘아주 빠르게’ ‘보통’ ‘느리게’… 이처럼 ‘파워포인트’에서는 움직임과 속도를 딱 떨어지는 숫자나 값이 아닌, 모호한 언어로 지칭하죠. 이 애매함이야말로 개개인의 경험적 순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 탁월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감정과 느낌이란 정확히 재단된 수치와 같은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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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39)은 사물의 존재감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다공간의 축적되고 혼재된 모습을 영상화한다. 파워포인트를 통해 말이다. “우리가 아는 그 컴퓨터 오피스 프로그램이 맞아요. 다들 처음엔 듣고 어리둥절해 하죠. 그걸로 어떻게 영상을 만드느냐면서요.” 집 근처 공원, 지하철역, 동네 풍경 등 가장 흔한 일상의 이미지를 수집, 선 도형 등을 통해 이를 파워포인트에서 일일이 그려낸 뒤, 이미지마다 시차를 두고 애니메이션 효과를 준다.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을 근거로 해,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의존하는 개념, 즉 공간에서 사람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은 개인의 움직임과 심리에 따라 각기 다르며 그 속도로 인해 사물은 보는 이마다 다른 의미로 기억된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마다 접하는 사물은 개개인의 감상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모든 것이 더욱더 정확해져 가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은 절대 획일화될 수 없음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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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은 각 공간에서 경험한 시간을 수집한 뒤, 이를 재현해 실제 공간에서 직접 경험한 시간과 작품 제작에 소요된 시간, 작품 러닝타임, 관람하는 시간까지 다채로운 시간성이 함께 존재하는 현상을 세밀하고 밀도 있게 모니터에 담아내왔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각 장소는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과정과 심리적 변화를 일으킨 순간을 보여주지만, 장소 간의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시에 공존하는 다수의 공간 혹은 공간에 대한 다수의 시점을 보여주는 분절적 재현에 가깝다. 그의 화면이 개인적이면서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공간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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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일상 공간과 사물이 특별하게 인식되는 순간과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이전 작업의 주제를 벗어나, 공간의 흐름이나 사물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서로 다른 맥락의 공간과 사물을 병치, 중첩해 상대적 시간성에 초점을 맞춘 신작을 선보인다.
이정민 개인전 ‘re, presentation’이 3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청담동 g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하는 프로젝터 작업은 관객이 직접 공간 속에서 빠르게 혹은 느리게 흐르는 선의 움직임을 통해 변화하는 시간성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또 다른 신작 모니터 작업에서는 일상적인 생활 패턴 속에서 심리적 의미가 축적된 장소를 선택하고 재조합해 새로운 가상공간을 선보인다. 시간성이라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주제에 대해 보다 쉽고 친숙하게 생각해보는 기회로, 저마다 시간성을 지니고 움직이는 화면 속 사물과 이를 지켜보는 관람객이 상호작용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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