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5.19 23:39
[권녕호]
7년 만에 개인전, 미술관 아닌 작업실에 꾸렸다
아뜰리에에 피어난 ‘계절의 맛’
열두 달, 사계의 흐름 주제로 한 신작 열두 점 선봬
2020 Art Chosun on Stage II
아트조선 기획전 ‘아뜰리에의 계절’, 6월 4일 청담동 루카511서 개막
작업실. 작가에게 산실의 공간이자 치열한 창작, 그 삶 자체인 곳. 속살과도 같이 은밀하면서도 영 궁금한 그곳이다. “저도 어렸을 때 그랬어요. 저 작가의 작업실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곳에서 그림을 그려낼까. 제멋대로 상상해보기도 했더랬죠. 어쩌다가 기회가 닿아 가게 되면 얼마나 좋던지요.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권녕호(65)가 작업실을 과감히 개방한 이유다. 7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을 정형화된 화이트큐브가 아닌 자신의 아뜰리에에다 차렸다. 사방이 새하얀 벽에 걸려있지 않더라도, 이젤 위에 정물처럼 놓인 그림이지만 왠지 더 눈길이 간다. 그 옆에 놓인 읽다가 잠시 덮어놓은 듯한 책 때문일 것이다. 작업에 있어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이 전부는 아니다. 캔버스에는 작가의 삶과 시간이 응집되기 마련이다. 작가가 듣고 보고 사색하는 것 또한 작업의 일부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이뤄지는 공간이 작업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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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프라이빗·예약제 관람 문화가 더 익숙한 오늘날, 작가는 한술 더 떠 이보다 더 프라이빗할 수 없는 자신의 작업실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올해 작업한 신작을 최초로 내보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1월부터 12월까지 열두 달을 한 화폭에 하나씩 담아 신작이 총 열두 점이다. 이 화면(畫面)에서 저 화면으로, 어느 곳에도 경계 지지 않고 굴곡 없이 흘러간다. 마치 사철이 순환하는 것처럼. “인간이 숫자로 월(月)을 구분 지어 나눠놓긴 했지만, 자연이란 스위치로 켜고 끄듯이 확 바뀌는 게 아니죠. 시간이 조금씩 지남에 따라 알게 모르게 스며들 듯 변화하는 게 사계 아니겠습니까.”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살며 작업한 작가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탐색한 끝에 한국의 정서적 경험을 자연의 생명력으로 재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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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달이 지닌 특성과 그에 따른 감성도 다른 법이다. 볕 쨍한 여름 7월의 느낌과 슬슬한 눈바람이 부는 12월의 그것이 같을 순 없을 테다. 권녕호는 특유의 속도감 있는 드로잉 기법을 통해 계절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변주하는 자연을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형상화했다. 동시에 단순화되고 함축적인 기호들을 반복하는데, 형체가 불분명한 도형, 선 따위가 화면을 가로지르며 자유롭고도 어지러운 느낌을 동시에 자아낸다. 그 사이사이로 조용히 자리 잡은 여백에서 동양화의 맛이 은근히 배어 나온다. 이를 더욱 배가하는 요소는 다름 아닌 바탕지다. 그는 이번 신작에서 겹겹이 배접한 화선지 위에 오일과 아크릴 그리고 먹으로 그림을 그리며 동서양 재료의 합일성을 실현하고자 했다.
“다만 저는 동양화를 선보인 적은 없어도 농담을 조절할 수 있는 먹과 이 먹물이 화선지 위에 자르르 번지는 걸 보면 참 좋았어요. 몸에 착 감기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했죠.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이게 내 정체성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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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녕호의 그림은 첫눈에는 지극히 서양적이고 세련되기만 한 것 같지만, 계속 보다 보면 오히려 동양적 감각으로 전복됨을 경험하는데, 이는 재료와 더불어 그의 작품 소재와도 연관된다. 자연은 작가의 오랜 화두다. 특히 꽃과 과일 등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한국 문인화에서 차용해 작가 고유의 조형언어로 변용한 것이다. 이를 두고 장동광 미술평론가는 “권녕호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동양적 미의식은 1990년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작품궤적을 형성하는 중요한 산맥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국적 물상에 서양화의 붓질로 조율된 회화적 헬레니즘, 그 세계성의 건축을 짓고 있다. 작품의 기표(記表)적 형식뿐만 아니라 기의(記意)적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도 동양의 정신성과 서양적 제스처가 긴밀하게 합류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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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조선 기획 권녕호 개인전 ‘아뜰리에의 계절 : Les saisons de l’atelier‘이 6월 4일부터 서울 청담동 루카511(3층)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한지에 오일과 아크릴, 연필, 먹을 사용해 전통적인 동양화의 바탕에 현대적 추상 기법을 풀어낸 신작을 포함 25점이 내걸린다. 권녕호는 어떠한 형태의 의미부여나 정의를 거부한다. 상징적 기호, 무의식적인 선과 여백을 결합하는 독창적 양식을 통해 보는 이에게 열린 해석을 선사한다. 이번 전시가 실제 그의 작업실에서 열리는 만큼 방문 시 언제라도 작가와 수준 높은 미적 소통이 가능하다. 주인장이 직접 설명해주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극진한 도슨트 프로그램이 또 있을까. 오프닝은 6월 4일 오후 4시이며, 전시는 전화 예약제로 휴일 없이 6월 20일까지 10:00~17:00 운영된다. (02)724-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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