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이것도 판화… 판화의 재발견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0.05.18 18:49

국립현대미술관 ‘판화, 판화, 판화’전…
13년 만에 마련된 판화 주제전
김상구, 김형대, 오윤, 황규백 등 한국 현대판화 작가 60여 명
8월 16일까지 과천관

 
판화는 예술성과 기술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매체다. 석판화, 동판화, 목판화, 실크스크린 등 판법에 따라 각각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을 제작해 잉크를 묻히고 종이에 찍어내는 섬세한 과정에서 타 장르에서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판화만의 아름다움이 빚어진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복제와 배포가 가능하다는 것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작가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일종의 미디어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1980년대 민중 목판화를 비롯한 현실의 사회적인 이슈를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판화 작품들이 그러하다.
 
이렇듯 판에 새기고 종이에 찍어낸다는 행위는 판화의 태동에서부터 인쇄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실제로 판화는 ‘책’이란 형식을 빌어 작품을 재해석한 판화 아티스트북 등으로 비교적 일상과 가까운 예술로 소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디지털 아트처럼 책과 판화의 개념을 확장한 작품들, 판화 일러스트북 등에서 판화와 인쇄문화의 접점이 확인된다.
 
‘판화, 판화, 판화’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이와 같은 판화의 특수성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 ‘판화, 판화, 판화(Prints, Printmaking, Graphic Art)’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다. 미술관에서 13년 만에 마련되는 판화 주제전이다. 국내 현대 판화를 대표하는 작가 60여 명의 작품 100여 점을 통해 판화라는 특수한 장르이자 매체, 개념이자 상황에 대해 짚어본다.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재발견이 필요한 장르 중 하나인 판화는 그동안 오랜 역사를 지니며 한국의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장르로 평가받았으며,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판법의 발전과 함께 작가들에게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매체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러 미디어아트, 융복합 예술 등 새로운 동시대 미술의 홍수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판화, 판화, 판화’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는 ‘책방’, ‘거리’, ‘작업실’, ‘플랫폼’ 4가지 구성으로 꾸려진다.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접해왔던 장소의 명칭과 특징을 빌려와 판화가 존재하고 앞으로 나아갈 자리들을 장소의 개념으로 조명한다. ‘책방’에서는 판화로 제작된 아티스트 북을 비롯해 인쇄문화와 판화의 관계를 나타낸 작품들이 전시된다. ‘거리’에서는 사회적인 이슈와 판화의 만남을 통해 예술이 일종의 미디어로 기능했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작업실’에서는 타 장르와 구분되는 판화의 고유한 특징인 다양한 판법들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플랫폼’에서는 동시대 미술의 장르 중 하나로서 확장된 판화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강행복, 화엄(아티스트 북), 2019, 21x15x18cm, 12, 작가소장
홍선웅, 제주 4.3 진혼가, 2018, 62x182cm, 목판화, 작가소장
 
강행복은 광주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미국 등 국내외로 활발히 활동하는 목판화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꽃과 나무, 구름, 길 등의 형태가 그래픽 디자인의 패턴처럼 빼곡히 새겨져 있다. <화엄>(2019)은 20권의 아티스트 북을 이어 붙여 설치 미술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동일하게 찍어낸 판화들을 모두 하나의 책으로 제본해 아티스트 북의 형식으로 제작한 두 가지 형식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판화의 과정을 마친 뒤 산사에 들어가 바느질로 제본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파편으로 흩어져있던 수많은 이미지와 형태, 기억 등이 하나로 모이고 엮이는 의미가 덧입혀진다고 스스로 말한다.
 
홍선웅은 민중 목판화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작품 속에서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거나 다시 해석한 작품을 보여준다. 주로 조선시대 민화나 팔만대장경 등 전통회화와 판화의 영향을 받았고, 작가 자신이 직접 문화유적을 방문하여 문헌을 연구하는 등 작업과 판화 연구를 병행하며 민중 목판화의 새로운 전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주 4.3 진혼가>(2018)는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제작한 단색목판화이다. 무덤에 망자의 넋을 달래준다는 의미를 지닌 꼭두인형이 등장해 사건을 지켜보는 증인의 역할과 바다에서 살풀이 춤을 추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혼을 달래주는 역할로 등장해 작가의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이영애, 내 날개 아래 바람 1, 1995, 120.5x171cm, 애쿼틴트,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소장
 
이영애는 50년간 동판화 작업을 이어온 대표적인 한국 여성 판화가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애쿼틴트 기법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제작해왔다. <내 날개 아래 바람 1>(1995)은 그의 애쿼틴트 기법의 특징이 잘 보이는 작품으로, 판형이 정해져있는 판화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화면이 눈에 띈다. 애쿼틴트는 동판화의 일종으로 동판을 부식시켜 요철을 만드는 에칭 기법 중 하나다. 고난도의 기술과 노동을 요구하는데 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이영애의 치밀한 묘사를 감상할 수 있다.
 
‘판화, 판화, 판화’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판화’라는 단어가 거듭 반복되는 이번 전시명은 복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판화의 특징을 담아내고자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타 장르에 비해 낯설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 접해본 판화, 여전히 자기만의 고유한 매력을 지닌 판화, 작가들의 주제의식과 기술 속에서 계속 이어질 판화에 대해 강조해 살펴보려는 전시의 의도를 반영했다. 전시는 온라인 사전 예약제로 관람할 수 있다. 8월 1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