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2.10 18:47
[김선두]
“장지 기법, 오랜 숙성기간 거친 ‘은근한 장맛’과 같아”
느림과 포용의 미학… 개인전 3월 1일까지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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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는 두껍고 견고하죠. 거친 붓질을 견디고 잘못 그린 걸 가제천으로 닦아내더라도 포용하는 걸 보면 은근과 끈기, 배려와 참을성이 합일돼 있다고나 할까요.” 김선두(62)는 서른 번에서 쉰 번은 족히 튼튼한 장지 위에 여러 겹의 색을 덧칠하고 쌓아 올려 발색한다. 겹겹이 칠한 색이 아래에서 위로 우러나오는 색감의 깊이가 바로 장지기법의 매력이다.
그는 장지 위에 분채를 수십 차례 반복해 쌓으며 깊은 색을 이끌어낸다. 견고한 장지에 색을 먼저 깊이 스미게 한 다음 얹히는 색을 그 위에 구사한다. 빙산의 일각처럼 장지 맨 위에 드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색보다도 진짜배기는 안에 스미고 쌓여 드러나지 않는 색인 셈이다. 옅은 색을 단계적으로 올리니 작업 과정에서 수정이 쉽다. 불완전함과 시행착오를 포용하는 화면이다. 공들여 쌓은 색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촘촘하고 튼튼한 장지가 물감을 깊이 머금어 발색이 곱고 그윽하다. 아크릴은 색과 색의 층이 단절되지만 장지에서의 색은 서로 소통하고 수렴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잘못 그려 수정이 필요하다면 가제천으로 닦아내기만 하면 된다. 장지 기법에는 관용과 통섭의 미학이 녹아있다.
장지기법이 흡사 우리의 김치나 장(醬) 문화와 일맥상통한단다. 김치를 담글 때, 배춧속에 양념을 겹겹이 묻혀 쌓고 쌓는 이른바 ‘겹의 미학’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색을 중첩하길 거듭하며 아래 깔린 색이 우러나오는 과정을 거친다. “색을 담그는 거죠. 고추장이 무조건 맵기보단 매운맛이 그윽하게 감싸는 것처럼 장지에선 강한 원색도 부드럽게 배어나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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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바탕 작업 없이 색을 중첩해 우려내는 ‘장지화’로 일본, 중국의 채색화와 구별된 독자적 화풍을 발전시켰다. 특히 수묵과 채색을 접목한 시도로 한국화의 지평을 넓히며 동양화 기법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강조한다. 기성 동양화가 정서 표현에 몰두했다면, 그의 작업은 일상의 깨달음을 진솔하게 표현해 현대인의 삶을 담는다.
김선두의 개인전이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열린다. 학고재에서 마련된 그의 네 번째 개인전으로 대표 연작 <느린 풍경> <별을 보여드립니다> 등을 포함해 진솔한 화법의 서정적 화면이 돋보이는 신작 19점을 내건다. ‘별을 보여드립니다’에서 빛나는 별과 시든 식물의 대비가 눈길을 끈다. 생명과 죽음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삶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 ‘동시에 보는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모두 함께 공생하는 법이다. 전시는 3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