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숲속에는 시공간이 교차하고 있다

  • 윤다함 기자

입력 : 2020.01.08 11:29

박광수, 흑백 선(線)으로 빚어낸 ‘시간적’ 화면
‘영영 없으리’展 12일까지 학고재

<깊이 - 골짜기> 116.8x80.3cm Acrylic on Canvas 2019 /학고재
<검은 숲 속> 53x40.9cm Acrylic on Canvas 2019 /학고재
 
숲은 미지의 생명이 꿈틀대는 장소다. 꿈과 현실의 경계이자 태초의 무의식이 자리한 공간이다. 숲이 무성해질수록 형상은 모호해지고 선이 흐릿해질수록 숨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적 풍경을 선(線)을 통해 확장하며 공상의 세계를 그려온 박광수(35)는 풍경과 인물의 경계를 흐트러뜨려 모호한 장면을 이끌어내는 작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어두운 숲속을 더듬어 가는 길이자 의식 너머에 숨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명도의 흑백 선이 중첩하며 우거지며 숲의 윤곽을 빚고 어둠을 피운다.
 
 
박광수의 작업은 생겨났다 소멸하고, 변화하는 형상이 서사의 진행을 암시하며 시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화면에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을 포용하는 전 과정이 응축돼 있는 셈이다. 2015년 SeMA 하나평론상을 수상한 곽영빈 평론가는 박광수의 작업에 대해 “대상이 ‘매 순간 진동하며 움직인다’는 것은 그의 작업이 ‘시간적’이라는 것을 뜻한다”라고 했다. 작가의 화면에는 결론을 유예한 채 모호하게 흘러가는 서사를 박제돼 있으며 대상이 형상과 명암의 경계를 흐리며 자라난다.
 
지금껏 그는 컬러는 배제하고 흑백의 세계를 응시해왔다. 색채의 사용을 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행위와 구성 논리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자 함이다. 채도가 없는 세상에서 시각은 명도에 의존하게 되며 어둠 속에 서서 바라보는 것처럼 대상과 나 사이 거리감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박광수가 전시 출품작 <깊이 - 스티커>(2019)를 설명하고 있다. /윤다함 기자
 
박광수가 새로운 기법으로 작업한 신작을 공개했다. 개인전 ‘영영 없으리’에 회화 25점과 드로잉 5점, 영상 1점을 내걸었다. 전시타이틀 ‘영영 없으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야기 시 ‘갈가마귀(The Raven)’(1845)에서 차용했다. 연인을 잃고 슬픔에 잠긴 화자의 방에 갈가마귀가 찾아와 읊는 대사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인물에 대한 화자의 희망과 갈가마귀의 절망이 반복적으로 교차한다. 인물의 부재에 반응하는 의식과 무의식, 감성과 이성 간의 대립이다. 박광수의 화면에 맞닿은 서사다.
 
이번 신작에서는 숨은 서사를 강조했던 기존 화면에서 더 나아가 표현의 변주가 돋보인다. 뚜렷한 선과 안개처럼 뿌연 흔적이 교차하며 평면 위에 광활한 공간감을 구현해냈으며, 번짐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의 명도 차이를 바탕으로 몽환적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화면을 감상할 수 있다. 12일까지 서울 삼청로 학고재 신관.
 
박광수 개인전 ‘영영 없으리’ 전경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