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1.03 18:52
흑인 정체성 담은 대형 신작 공개
‘These Elements of Me’, 2월 1일까지 페이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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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사방 벽을 가득 메운 작품 46점은 한 몸이다. 설치도 판매도 모두 함께 이뤄지는 ‘한 세트’다. 다작을 지양하고 일 년에 고작 십여 점 제작하는 작가로선 큰 도전이자 색다른 시도였다. “이렇게 대형 스케일로 작업해 전시하는 건 최초에요.” 28세의 나이에 세계 메이저 화랑 중 한 곳인 페이스갤러리가 1970년대 이후 영입한 작가로는 최연소로서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아담 팬들턴(Adam Pendleton·36)의 국내 첫 개인전이 마련됐다. 전시가 개막하자마자 빅뱅 지드래곤이 방문하고 소셜 미디어에 올려 화제가 됐던 그 작가다.
또한 2017년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최고의 미술서적’의 저자이기도 하다. ‘블랙 다다 리더(Black Dada Reader)’는 언어의 무한하고 혁명적인 가능성을 주제로, 역사, 정치, 예술사를 언급하면서 모더니즘의 역사를 제안하고 현대 문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고 해체하는 수필집이다. ‘블랙 다다’란 흑인성과 추상, 아방가르드가 연계된 작가의 대표 시리즈명이자 작품의 콘셉트이지만 정작 뚜렷한 정의는 없다. 다만 그는 이에 대해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특이한 이력은 하나 더 있다. 솔 르윗이 그의 첫 컬렉터라는 것. 17살에 제작한 작품 중 하나가 솔 르윗 조수의 눈에 띄어 서로의 작품을 교환하기로 합의해 솔 르윗이 팬들턴의 최초 컬렉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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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팬들턴은 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학이나 음악에서 나온 역사적, 미적 내용을 바탕으로, 사회저항운동, 다다, 미니멀리즘, 개념주의 등 정치예술사를 포함해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1960년대 시민권 운동이나 ‘Black Lives Matter(2012년 미국에서 흑인 소년을 죽인 백인 방범요원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며 시작된 흑인민권운동)’와 같은 흑인 미국 역사의 주요한 순간에 초점을 맞춰 언어, 텍스트, 이미지, 음악 등 다매체를 활용해 작업한다.
특히 거울이나 투명한 슬라이드와 같이 반사되는 표면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번 출품작 역시 번들번들한 투명한 마일러 필름을 소재로 한다. “마일러 필름의 표면은 마치 거울처럼 보는 이의 모습을 비추는데 이를 통해 작품을 만드는 저의 시점,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점이 하나로 엮어질 수 있거든요.” 주변 환경에 반응하는 표면은 관람객과 오브제를 중재하고 관계하며 자연스레 참여를 요구하는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아울러 마일러 필름은 경계선이나 버팀대로서, 동시에 레퍼런스가 순환하고 상호작용하는 투과막으로서도 작동한다. 언어 자체를 정치적 논쟁의 공간으로 위치시키는 상호 간섭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는 언어와 이미지 조각을 걸러내어 같거나 서로 유사한 요소들로 형식적인 순열을 만들어 규칙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형태의 반복, 미완성,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한 패널에서 다음 패널로 흡사 하나의 이야기처럼 펼쳐낸다. 텍스트와 이미지 따위가 어지럽게 얽힌 화면은 작가로서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자, 정체성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내는 과정과 그 해답이기도 하다. 직접 쓰거나 그린 글귀와 드로잉을 역사적인 사진 혹은 읽던 책의 한 페이지를 함께 배치해 추상과 언어, 흑인으로서 또 게이로서의 자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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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NOT THE’ ‘BUT NOW I AM’ ‘BUT NOW WE’ ‘THE NOW I AM’ ‘BUT WAS THE’와 같은 텍스트의 기묘한 조합을 통해 혼란스럽다. 모양, 흔적, 기계적으로 재생산된 이미지는 단어로 구성된 공간을 침범해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떠돌아다니는 어휘 기호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번 신작에서는 아프리카 문화권의 가면과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가면을 쓴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되는 것과 같아요. 이로써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체성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니까요.” 전시는 2월 1일까지 서울 이태원로 페이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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