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과 적폐청산的 미술 담론④] 민중미술의 이분법적 선악 대결 세계관

  •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 대표

입력 : 2019.12.30 10:44

어느 날 ‘적폐청산 미술분과위원회’의 흑기사들이 ‘정의의 칼’을 뽑았다. 이들은 기성세대 미술가들의 예술지상주의적 해악(害惡)을 단죄하여 이들의 보수적 미술을 축출하고 독재, 불평등, 특권, 소외, 갑질 같은 사악한 세균이 말끔히 청산된 사회를 건립하는 데 참여한 미술만 ‘올바른’ 미술로 인정한다는 격문을 사방에 퍼뜨렸다. 칼잡이 흑기사들은 그 후 각종 벼슬을 지내며 역사를 고쳐 썼다. 지지층도 결집해 나갔다. 현실에 대해 발언한 희생적 미술이 현실을 외면한 상업적 미술보다 우월하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나라의 보배라는 미술 공론(公論)을 확립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누구도 감히 이 공론이 위험하고 틀렸다고 말하지 못한다. 미술사가 고쳐 쓰였다는 사실조차도 잊혀 간다.
 
이 칼잡이 흑기사들은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다. 1970년대 말 ‘현실과 발언’이라는 그룹으로 시작하여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성장하고 민주화와 더불어 미술계를 주도하며 왕성하게 활동해 온 실재 미술인들이다. 그들의 격문을 살펴보자. 윤범모 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민중미술 운동은 … 유미주의(唯美主義)의 안일함을 걷어차게 하면서 거친 현장으로 나가게 했다. 서구 사조의 눈치를 보면서 삶의 현실과 무관한 작업을 하던 이른바 모더니스트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질타하는 계기였다”라고 선언했다.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은 “한국의 모더니스트들은 두 가지 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 삶으로부터 떨어진 독립적 미술이었고, 둘째 한국 전통과 연결되지 않은 외국산(産)이었다. 민중미술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최초로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일으킨 미술 운동이었고 최초의 한국 자생 미술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전 ‘광장’에 내걸린 최병수의 대형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아트조선
 
윤범모와 김홍희가 지적하는 모더니스트는 추상미술 작가들을 일컫는데, 그들에 의하면 민중미술은 한국 역사에 대한 의식을 표명한 최초의 미술이다. 즉 민중미술은 민주화의 당위성을 인지하는 역사의식을 가진 최초의 깨인 미술이고 추상미술과 같이 그 이전의 미술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지 못하는 미몽(迷夢)에 빠져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듯 민중미술가와 이를 지지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한국 미술 역사는 한쪽에는 민주화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괘씸하게 무시하던 작가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역사의식이 투철한 민중미술가들이 벌이는 단순한 도덕책이다. 악당 혹은 무지몽매한 자 대(對) 정의의 사도 혹은 선각자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인 셈이다. 여기에 외제 대 국산의 대립각까지 중첩한다.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은 “한국 문화예술계에는 현대예술의 흐름을 보수와 진보,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대결 국면으로 파악하면서, 모더니즘이 우세하게 드러나는 서구보다는 리얼리즘의 심화를 이루는 한국과 제3세계의 예술에서 20세기 세계예술사의 빛나는 성과를 찾아볼 수 있다는 당당한 문예이론이 있다”고 했다. 한국미술사에는 추상미술 대 민중미술, 세계는 서구 대 제3세계라는 프레임을 짜놓곤 그 대결의 진흙탕에서 민중미술이 슈퍼스타라는 것이다. 
 
유홍준과 윤범모는 한국 현대미술사를 설명할 때 당대에 공존하던 다른 미술사조들은 제한 채 과거에서 전거(典據)를 찾았다. 그 이전의 한국 역사에서 민중미술의 속성과 공명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했다. 진경산수화가, 월북 작가들, 이중섭, 박수근, 이응노 같은 작가들에 대한 애정 어린 고찰은 이 과정에서 나왔다. 이러한 선택적 과거 소환(召喚)은 민중미술의 리얼리즘 속성이 옛날부터 연연히 흐른다는 역사를 발굴해 신화화(神話化)하려는 의도였다. 원병(援兵)을 과거 역사에서 징집하여 민중미술의 도도한 흐름으로 미술사를 재정렬하는 추세는 갈수록 강화됐다. 한국 미술의 ‘순혈성’이 강조되면서 타고난 우월성이라는 자아도취까지 불러왔다.
 
지난 9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절필시대’展 출품작. /아트조선
 
민중미술은 근본적으로 선악(善惡) 대결로 역사를 이분하는 전형적인 비예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현실의 복잡하고 은밀한 간극을 탐구하고 회색지대를 보려고 하지 않는 흑백논리 개념화다. 이렇게 된 것은 민중미술 운동가들이 한국 역사가 전개되어 온 다중적 과정과 그 시간 속에서 다양하게 탄생한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오로지 민주화라는 최종 목적에 이르는 과정만으로 파악하는 목적론적(Teleological) 역사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적론적 역사관은 자기가 설정한 고지만 보면서 그 고지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사건은 지나치게 크게 보고 나머지 사건들은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맥락에서 유홍준이나 윤범모가 ‘서구 모더니즘의 불쾌한 모방’이라고 하는 1970년대 단색화는 민주화라는 성지에 도달하는 일련의 투쟁에서 ‘딴짓’을 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이 작가들은 현대미술사에 실재하고 나름대로의 삶을 살며 의미 있는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세대다. 다른 구상작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나름의 예술성과 존재성이 있다. 민중을 위한 ‘걸개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미술 공론에서 일방적으로 삭제하는 것은 보복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민주화를 그렇게 외치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은 뒤 자신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독재 체제와 똑같은 오류와 독선을 부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술은 종합이다. 창조적인 다양성이다. 다양한 작가들의 대립, 상호 영향, 상대적 차이, 공통점 등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결합한 미술 이야기가 우리에게 긴장과 흥분을 가져다주는 법이다. 이 창조적 다양성이 감수성을 승화시키고 정신세계의 피폐를 막아준다. 진보라고 하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얄팍하고 협소하게 규정하고 단일 문맥적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 실제로는 퇴보가 아닐까. 미술계가 대결적 이분법 사고로 미술 작품과 작가들을 평가하게 된 것은 민중미술 운동가들이 만들어놓은 퇴행이다. 추상이냐 구상이냐, 정치적 참여인가 회피인가와 같은 편 가르기 세계관을 벗어나서 관찰해야만 다양한 미술 작품의 특징과 작가의 창조적 진화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그 시야에서 한국 현대미술사가 제대로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케이트 림(Kate Lim)은 미술 저술가이자 아트플랫폼아시아(Art Platform Asia) 대표로, 지난해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전시 ‘다섯 가지의 흰색-한국 5인의 작가’의 서문을 쓰고, 박서보의 영문 평전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2014)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외 저술로는 ‘Language of Dansaekhwa: Thinking in Material’(2017), ‘Making Sense of Comparative Stories of Art: China, Korea, Japan’(출간예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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