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2.23 19:11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등장인물은 60명인데 배우는 고작 5명, 쉴 틈 없이 역할이 바뀌는 ‘캐릭터 저글링’
스탈린·트루먼 대통령·김일성… 세계사가 따로 없는 기상천외한 모험담
백 세 노인이 터뜨리는 삶의 불꽃이 전하는 웃음과 위로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은 자신의 생일잔치를 1시간 50분 남기고 창문을 넘어 양로원을 탈출한다. 버스 터미널에서 우연히 갱단의 돈 가방을 훔친 그는 이를 되찾으러 온 조직원까지 의도치 않게 죽이게 되고,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도망 다니기 시작한다. 한편, 양로원에서는 원장이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 기자까지 불러 모은 바람에 알란의 행방불명이 납치 사건으로 둔갑해 뉴스 속보로 전해지고 신문에까지 대서특필 된다. 100년이 지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같은 노인의 유쾌하고 기상천외한 모험담, 바로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이야기다.
요나스 요나손이 집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극은 황당무계한 추격전이 벌어지는 현재와 알란이 과거 100년 동안 근현대사의 격변에 휘말리며 겪어 온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1905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생계유지를 위해 폭약 회사를 차린 알란은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을 구한 후 미국에서는 오펜하이머의 핵 개발에 일조하고, 러시아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등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을 만나 굵직한 사건을 몸소 경험한다. 무려 9개국을 거쳐 11명의 역사 속 실존 인물과 조우해 온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는 미국의 간첩으로 발탁돼 소련에서 친구 유리와 함께 냉전을 종식하기도 한다.

한 편의 역사서나 다름없는 인생을 살아 온 덕분일까. 알란은 갱단의 조직원이 목숨을 위협해 와도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태연히 받아치는 초연함을 드러낸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의연히 대처하고 후회 따위 없는 삶을 사는 그는 돈도 명예도 필요 없이 술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이야기 나눌 친구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는 낙천성과 단순함으로 세상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한다. 모든 일에 대해 자책하는 70세 좀도둑 율리우스, 온갖 분야에서 거의 전문가에 가깝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은 없는 베니,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한 구닐라가 갱단과 경찰로부터 쫓기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알란의 곁에 남기를 택한 이유일 터다. 그는 특유의 초탈함과 넓은 관용으로 갱단의 두목 예르딘마저 한순간에 갱생의 길로 이끈다.
무대를 가득 메운 나무 서랍 안에는 공연에 필요한 온갖 소품과 함께 5명의 배우가 60여 명의 인물을 비롯해 개와 코끼리까지 연기하며 사용할 이름표가 잔뜩 들어 있다. 주인공 알란을 맡는 배우를 제외한 4명은 알란1, 알란2 등 배역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여되지 않는데, 이들은 모두 벨크로(찍찍이)가 붙어 있는 푸른 점프 슈트를 입고서 이름표를 붙였다 떼며 극을 이어 나간다. 간혹 6명 이상이 등장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명을 동시에 연기해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어려움에 봉착한 배우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지다가도 이를 결국 소화해 내는 센스에 감탄하기 일쑤다. 알란으로 분하는 배우마저 종종 다른 배역으로 무대에 서는데, 특히 11살의 김정일로 등장해 아버지 김일성의 품에 안긴 채 자신을 속인 알란을 총살해 달라고 떼쓰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서랍은 각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연도와 국가를 LED 조명으로 표시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은 물론 전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누벼 헷갈리기 십상인 전개의 이해를 돕는다. 국가가 바뀔 때면 “건배”를 그 나라의 언어로 외치며 흐르는 음악에 맞춰 다 함께 전통춤을 선보여 단조로울 수 있는 연극에 보는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사회주의에 물들어 가족을 떠나서는 사유재산 금지에 반대해 레닌 정권에 의해 총살당한 아버지,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형과 달리 아내의 이름도 못 외울 정도로 멍청한 아인슈타인, 배우들이 개를 연기하지 않기 위해 이름표를 서로에게 떠넘기거나 배경이 북한으로 변하자 정치적 논란을 걱정하는 모습 등 예상치 못한 순간에 던져지는 유치한 농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하게 된다.

1983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알란이 고양이 몰로토프를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극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왔지만 언제나 핵폭탄 기술자로서 대우 받아온 그는 처음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몰로토프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게 된다. 10살의 나이에 잃은 부모부터 가장 친한 친구 유리까지 긴 세월 동안 수도 없이 “안녕”이라 말해온 그도 하루아침에 여우에게 물려 죽은 몰로토프에게는 쉽사리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여우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알란은 여태껏 보여준 매사에 차분하게 대응하던 모습과는 대비를 이뤄 관객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그가 양로원에 들어간 것도 여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폭탄을 설치했다가 집을 몽땅 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알란은 왜 양로원을 탈출했을까. “알란, 성냥갑을 흔들어요. 성냥을 꺼내요. 성냥을 그어요. 다시 불꽃을 일으켜요.” 몰로토프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인 성냥갑마저 뺏긴 후 양로원에서의 여생을 무기력하게 보내던 알란은 운명처럼 다시 손에 쥐어진 성냥으로 새로운 삶의 불꽃을 터뜨린다. 그렇게 시작된 시한폭탄만큼이나 위험하지만 언제나 재치와 침착함을 잃지 않는 100세 노인의 예측불허 모험담은 쉴 틈 없이 여러 역할을 오가는 ‘캐릭터 저글링’이라는 기발한 방식으로 큰 웃음을 선사하면서도,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용기와 위로를 전한다. 내년 2월 2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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