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 온몸으로 맞이하는 반 고흐… ‘빛의 벙커’展

  • 윤다함 기자

입력 : 2019.12.17 14:55

900평 공간, 프로젝터 90대·스피커 69대로 꾸린 몰입형 미디어아트전
벽면 가득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대는 명작 이미지들
2020년 10월 25일까지 전시

 
빛과 그림자의 끊임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반 고흐의 생동감 넘치는 강렬한 붓터치를 온몸으로 감상할 수 있는 ‘빛의 벙커: 반 고흐’전(展)이 내년 10월 25일까지 제주 성산 빛의 벙커에서 열린다. 고흐의 회화 800점과 드로잉 1000점을 미디어아트로 재구성, 고흐 특유의 대담한 색채와 독창적인 표현력이 벙커 벽면과 바닥을 가득 채웠다. ‘감자 먹는 사람들’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반고흐의 방’ 등 몰입형 미디어아트 시스템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의 명작에 둘러싸여 고흐의 감성적이면서도 혼란에 가득 찬 내면세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고흐의 색채적 풍부함이 돋보이는 화려한 시각효과와 웅장한 음악은 작품의 생명력과 물감의 두터운 질감이 느껴지는 임파스토 기법을 더욱 강조하며 관람객에게 완전한 몰입의 경험을 선사한다.
 
/티모넷
/티모넷
 
전시는 고흐의 삶의 각 단계와 뉘넨(Neunen), 아를(Arles), 파리(Paris), 생래미 드 프로방스(Saint Rémy de Provence),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등에서의 흔적을 따라 꾸려진다. 첫 번째 시퀀스는 알프스에서 생레미까지 프로방스의 중심에서 시작된다.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프로방스의 햇빛이 캔버스를 넘나들고 벙커의 벽과 바닥 전체를 빛으로 가득 채운다. 밀밭은 다채로운 푸른색으로 덧칠해지고 하늘은 노란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여진다. 이러한 반전 컬러는 그가 얼마나 풍경을 자유롭게 다뤘는지 말해준다. 반면, 북부지방 풍경의 어두침침하고 우울한 색조는 농민들의 가혹한 일상생활을 나타낸다. 어부와 농민의 다양한 초상화가 벙커의 벽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뒤를 이어 그들의 마을과 집 그리고 반 고흐의 유명한 작품인 ‘감자 먹는 사람들’에 등장한 집의 내부가 스쳐 지나간다.
 
1888년 반 고흐가 아를에서 완성한 7개의 정물화 시리즈 중에서, ‘해바라기’는 그가 프로방스로 돌아왔음을 상징한다. 꽃다발과 다채로운 색상의 꽃잎은 색채의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고흐가 동생이자 후원자였던 테오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빈센트 빌럼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1890년 그린 ‘꽃피는 아몬드 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후 19세기 말 파리 시기에는 아니에르에서 몽마르트르까지 아직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 파리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다음 이어지는 ‘아를’ 시퀀스의 하이라이트는 그가 이 시기 그린 가장 유명한 작품인 ‘밤의 카페 테라스’ ‘노란집’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이다. 아를은 프랑스 남부 마을로, 고흐의 작업 흐름에서 중요한 곳으로, 이 시기 빛을 작품에 사용하는 기법을 완성해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인 사이프러스 올리브 나무의 모티브가 벙커 내부를 가득 채워 장관을 연출한다. 1889년 사이프러스 나무 시리즈에 자연을 통해 느낀 아름다움과 혼란스러움을 담아냄으로써 풍경화 시리즈를 재창조해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과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수천 개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서 숭고한 듯하면서 불길한 분위기가 동시에 느껴진다.
 
‘생레미 드 프로방스’ 시퀀스에서는 고흐가 1889년 요양했던 생레미의 요양소의 내부 풍경에서부터 시작돼 정원과 가로수 등의 외부로 이어지며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고흐의 자화상 시리즈가 벙커를 가득 채운다. 붓터치에서 그의 불안한 심리상태가 여실히 나타나며 깊은 고뇌와 당시 작가의 격정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듯하다. 전시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주관적 표현한 주요작 풍경화로 마무리된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말년 완성한 작품으로, 금색으로 물든 밀밭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불길한 느낌의 하늘을 특징으로 한다. 먹구름이 잔뜩 낀 우울한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 떼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캔버스를 가득 덮고 있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서는 고흐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폴 고갱의 작품도 함께 만날 수 있다. 고갱의 작품으로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를 꾸린 건 세계 최초다. 1848년 파리에서 태어난 고갱은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로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타히티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은 색채는 그의 예술 세계를 완성했다. 전시는 이런 예술가의 상징성과 내면성, 비자연주의적 경향을 ‘섬의 부름’ ‘폴 고갱: 예술에 대한 사랑’ ‘브르타뉴 섬을 오가며’ 등의 테마로 나눠 구성된다.
 
/티모넷
 
한편, 빛의 벙커는 제주 서귀포시 성산에 옛 국가 기간 통신시설로 오랜 시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벙커로, 본래 국가 기간 통신망을 운용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이다. 축구장 절반 크기인 900평의 공간에 90대 프로젝터와 69대 스피커를 배치해 관람객들이 직접 예술가의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대형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흙과 나무로 덮어 산자락처럼 보이도록 위장됐다. 자연 공기 순환 방식을 이용해 연중 16℃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고 방음 효과가 완벽해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에 최적화돼 있다. 입장료는 9000~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