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2.11 13:53
[연극 자전거도둑헬멧을쓴소년]
자전거 도둑이 오토바이 도둑 된다?
냉혹한 사회 속 범죄자로 내몰린 청소년
박완서 단편 소설 ‘자전거 도둑’의 배경 현대로 각색해 무대화
발렌시아가, 먹방 유튜버, 치킨 배달 알바… 극사실주의적으로 그려진 청소년의 현실

박완서 작가의 ‘자전거 도둑’이 4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 맞춰 이제는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훔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기용품 도매상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1970년대의 수남은 명품을 사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치킨을 배달하는 오늘날의 수남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을 향한 사회의 따가운 눈초리와 공부해서 대학 가야 대접받는다는 어른들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수남은 오늘도 헬멧을 쓰고 거리로 나선다.
청소년극 ‘자전거도둑헬멧을쓴소년’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는 세태를 보여준다. 수남은 오토바이를 타고 밀린 배달을 하던 중 눈길에 미끄러져 자동차와 충돌한다. 누가 봐도 경미한 사고임에도 차주는 막무가내로 고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며 오토바이를 담보로 잡고, 억울함과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던 수남은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다. 엄연한 도둑질을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잘했다며 칭찬하는 치킨집 사장의 태도는 수남의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오토바이 사고로 합의금 문제가 빚어지기 전부터 극에는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서려 있다. 소년원에 직업 체험 봉사를 나가면서도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는 교육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받은 명품 옷을 자랑하는 명구, 그 옷을 압수해 돌려주지는 않고 보란 듯이 걸치고 다니는 선생님, 명구가 부러워 ‘짝퉁’을 사 입고 나타난 주희. 여기에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 직종인 유튜버 빈쯔가 더해지며 갈등은 극에 치닫는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며 소외당하던 그는 ‘먹방(먹는 방송)’으로 세상의 관심을 갈구한다. “추잡스럽게 남들 앞에서 처먹는 거 보여주고 싶냐?” 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추호도 하지 않는 빈쯔의 아버지는 사실 수남에게 부당한 합의금을 요구하고 있는 사기꾼이다.
원작에서는 도둑질만은 하지 말라는 아버지가 주인공의 윤리 의식을 그나마 지켜주지만, 이 극에서는 믿고 따를 어른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 어른다운 어른 하나 없는 사회에 무방비하게 내던져진 수남과 친구들에게 바르고 착한 청소년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0만원을 벌기 위해 아버지와 다투는 모습을 방송에 내보낸 빈쯔에게 달린 댓글은 “애비 패면 300만원.” 수남과 친구들은 합의금 300만원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노동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명품 옷을 가진 명구도 포함된다. 어른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해 몸과 마음이 병드는 데에는 수저의 색깔조차 중요하지 않다.

타원형의 무대의 가장자리에는 육상 트랙이 깔려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굴레와도 같은 그 트랙을 따라 끊임없이 질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 청소년도 껴있다. 어려운 현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려는 청소년의 목소리에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훈수만 놓던 어른은 정작 이들이 어려움에 봉착한 순간에는 모른 척하기 일쑤다. 의지할 곳을 잃은 청소년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로지 헬멧 하나만을 믿고 달린다. 이들이 언제까지 달릴 수 있을까. 수남과 함께 일하던 헬멧을 벗지 않는 소년은 어느 누구보다 빨리 달렸지만 끝내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수남은 이제 전처럼 오토바이를 타기가 두려워진다. 매일같이 내달리던 길은 단 한 순간도 녹록한 적 없지만, 유달리 더 냉혹하고 위험하게만 느껴진다.
일하는 청소년은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이들은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보호받지 못한 채 쉽게 버려지는 ‘티슈 노동자’로 전락한다. 대부분의 청소년극이 주인공의 성장에 초점을 두고 청소년기를 비교적 낭만적으로 풀어내는 반면, 이 작품은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 청소년의 날선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극사실주의적으로 구현되는 현실에 씁쓸함을 제대로 맛본 관객은 끝까지 시원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다. 찜찜하게 막이 내린 후에는 그 흔한 배우 인사조차 진행되지 않아 극의 잔상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게 만든다. 청소년 관객은 자신의 입장을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낄 수 있지만, 지금껏 이를 외면해 온 성인 관객에게는 편안함이 허락되지 않는다. 불편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다면, 이제는 이 시대의 수남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시간이다. 오는 15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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