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12.06 18:05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개성 강한 여섯 병사의 ‘케미’로 재미 보장, 여신님이 전하는 위로는 덤
어느덧 여섯 번째 시즌, 흥행 비결은 클리셰 한참 벗어난 한국전쟁 이야기

총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한국전쟁. 남한군의 감시 아래 북한군 포로를 이송하던 중 배가 난파되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무인도에 고립된다. 심지어 포박된 채로 배에 몸을 실었던 북한군들이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도리어 남한군인 영범과 석구가 포로 신세가 된다. 무인도를 탈출하지 못하면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일하게 망가진 배를 고칠 수 있는 선박 조종수 순호는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편을 죽여야 했던 여섯 병사는 이제 무인도에서 또 다른 생사의 기로에 선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신은 코빼기도 안 비치는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이야기다.
제목에 속아 아프로디테와 같은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이나 외양이 아름다운 사람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 있다. 작품 속 여신은 산신령이나 성주신처럼 무인도에도 신이 있다는 영범의 거짓말에서 비롯된다. 부탁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여신님을 위해 순호는 선박을 고치기 시작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섬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여신님이 보고 계셔’ 작전에 돌입해 그 존재를 믿는 척한다. 여신이 진짜로 보인다는 순호를 보며 전보다 더 정신을 놓았다 해야 할지, 본격적으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니 정신을 차렸다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세에 능한 영범은 이 상황을 이용해 여신님이 보고 계신 섬을 더럽히면 안 된다는 명목 아래 여러 규칙을 만들어 포로 처지에서 벗어나기까지 한다.

분명 순호가 정신을 다잡을 수 있도록 믿는 척만 했던 여신은 어느새 모두에게 절박한 상황 속에서 참고 버틸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 이들은 전쟁에 치여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을 여신에 대입하며 다시금 꿈과 희망을 찾아간다. 누군가에게는 만날 수 없어 그리운 가족이, 누군가에게는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한 첫사랑이 생존에 대한 희망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무인도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다. “당신을 믿는 척하면 다 될 줄 알았어. 더 이상 안 싸우고 다 괜찮아질 줄 알았어.” 전쟁통에 형을 잃은 순호에게 여신은 그 어떤 싸움도 속임수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다. 전쟁 하에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던 여섯 병사는 차츰 이들을 가로막던 이념의 장벽을 무너트리고 돈독한 형제애를 자랑하는 동지가 된다. 이 모든 것이 “미움도 분노도 괴로움도” 모두 숨결로 녹여 버리는 여신님이 바라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단어만으로 좌중을 엄숙하게 만드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객석에서는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포로 신세에도 여전히 입은 살아 있는 영범과 이에 기막히게 장단을 잘 맞추는 석구는 명콤비가 따로 없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고 욕설과 폭력을 일삼던 창섭도 생전 입 밖에 내본 적도 없는 여신님이라는 말을 힘들게 꺼낸 이후로는 무인도 탈출의 열쇠를 쥔 순호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며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된다. 의도치 않게 권력의 꼭대기에 앉은 순호, 눈치 없이 창섭의 심기를 건드리는 주화, 조용하다가도 간간이 말 한마디로 핵심을 찔러 ‘팩폭’을 날리는 동현까지. 적군으로 만나 난데없이 신심으로 뭉치게 된 이들의 좌충우돌 생존기에 경쾌한 음악과 막춤이 재미를 더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까악대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포탄 소리보다도 많이 들을 수 있다.
극은 여타 전쟁 소재의 문학이나 영화에서 봐온 상투적인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전시임을 상기시킬 무기 상자는 여신님 자리 아래 숨겨져 있고, 관객은 이들에게 다른 색깔의 군복을 입힌 이념을 원망하는 동시에 누군가 목숨을 잃는 장면이 아니라 각자 잃어버렸던 여신을 되찾아가는 모습에 눈물 흘린다. 2013년 초연한 작품이 무려 여섯 번째 시즌으로 돌아오며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일 터다. 들리지 않는 총성과 흐르지 않는 피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힘든 세상살이에 대한 위로다. 여신님이 보고 계신 무인도는 무대 위에 있지만, 극장을 빠져나오는 관객은 마음속에 자신만의 여신을 하나씩 품고 나와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다. 무인도가 아니더라도 여신님은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3월 1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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