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림자와 황금을 맞바꿀 수 있다면, “서명하시겠습니까”

  • 아트조선 송지운 기자

입력 : 2019.12.03 22:22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르네 마그리트 회화 닮은 무대… 이게 바로 초현실주의 뮤지컬
그림자가 사라진 무대 채우는 앙상블의 화려한 안무
인간의 욕망과 소수자 배척하는 차별 사회 조명

LED 화면을 통해 구현된 현실과 동떨어진 시공간은 한 폭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알앤디웍스
 
여기 황금에 눈이 멀어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았다가 영혼마저 잃게 생긴 남자가 있다.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속 주인공의 이야기다. 페터는 회색 양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남자 ‘그레이맨’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팔고 그 대가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고 결국 도시에서 추방된다. 더 이상 태양 아래 설 수 없게 된 페터는 원래의 삶을 되찾기 위해 그레이맨과 재회하고, 이번에는 그림자와 영혼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받는다.
 
그림자를 팔아 금화가 마르지 않는 주머니를 얻는 기이한 이야기는 동서남북은 물론 중력마저 무시해 버린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져 우리가 보고 느끼는 3차원의 세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과 환상을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듯 사실적으로 묘사해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를 보는 것 같다가도, 페터가 추방된 후 여러 도시를 떠도는 여정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페터의 방과 정원은 샤갈의 작품을 연상한다. 이처럼 초현실주의 화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무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신비하면서도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평소 건축물을 빼닮은 커다란 구조물로 이뤄진 무대 디자인을 선호하는 관객도 이 작품의 영상 연출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달빛 아래 리나와 손을 마주잡고 선 페터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파스칼은 그를 도시에서 추방하고자 하고, 그레이맨은 이 상황을 LED 스크린 벽 위에서 체스 게임 보듯 관전하고 있다. /알앤디웍스
 
쏟아지는 조명 아래 페터는 어떻게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고광택으로 특수 처리된 무대와 벽을 가득 메운 LED 화면, 대형 미로를 이루는 10개의 검은 판은 배우들의 그림자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린다. 이 극에서 그림자는 우산을 쓰고 거니는 페터 뒤로 우산의 그림자만이 보이는 등 영상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특히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앙상블이 연출해 내는 그림자다. 배우들은 그림자를 잃은 페터와 그레이맨을 제외하고는 모두 짝을 이뤄 완벽하게 대칭을 그리며 무대를 누비는데, 단순히 사람과 그림자가 동작을 맞추는 것을 넘어 인물이 느끼는 놀람, 두려움 등 감정이 담긴 격렬한 안무를 선보인다. 다짜고짜 페터의 그림자가 우아하고 근사하다고 노래하는 그레이맨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도 그의 그림자가 무용수의 아름다운 몸짓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극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거대한 미로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와 한순간에 페터를 가둬 버리다가도, 미로가 걷히면 그 뒤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미로는 주인공이 직면한 문제와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 자체로 기묘한 불안을 자아낸다. 페터가 그레이맨과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는 장면에서는 공간이 뒤틀리며 시간이 늘어지는 것처럼 표현돼 그의 간절함과 불안감이 객석에까지 전해진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칼 같이 동작을 맞춰 무대를 가로지르는 그레이맨의 수하들은 페터를 벼랑 끝까지 내몰며 압박한다. 더불어 그레이맨이 자신이 수집해 온 그림자 무리를 대동하고 무대를 집어삼킬 것처럼 강렬하게 등장할 때면 관객은 자연스레 페터와 함께 두려움에 휩싸인다.
 
페터와 그레이맨이 처음 만나는 이상한 파티에서 ‘God Bless You’를 부르는 사람들은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자신이 무얼 잃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눈앞의 욕망만을 좇으며 산다. /알앤디웍스
 
막이 오르기 전부터 무대 위로 보이는 두 개의 검은 손은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속 아담과 창조주의 손을 닮았다. 페터는 아담처럼 신의 손과 맞닿길 바랐지만 “저 천사와 손을 잡기를” 노래하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의 합창을 들으며 악마의 손을 잡기에 이른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두 손은 책장을 넘기듯 장막을 거두고 배경을 전환해 가며 극 자체를 악마의 농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사건이 실은 체스 게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페터의 정원에는 검은 말이, 그의 과거 연인 리나의 정원에는 하얀 말이 자리하고 있고, 갈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레이맨은 광기 어린 모습으로 “체크”와 “체크메이트”를 외친다. 페터를 잠들게 하기 위해 그레이맨이 ‘꿈의 검’으로 베어 냈던 리나의 정원이 실로 꿰맨 자국이 선명히 새겨진 채로 다시 등장하는 순간, 페터가 악마의 놀잇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공연 제작사 알앤디웍스가 악마와의 거래를 소재로 뮤지컬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한 오마주로 5년 전 초연한 ‘더데빌’은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록과 클래식을 결합한 작곡으로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이번 작품 역시 ‘God Bless You’ ‘그게 대체 뭐라고’ 등 중독성 있는 음악으로 악마가 등장하는 어두운 내용을 신나게 즐길 수 있게 만든다. “갓 블레스 유, 갓 블레스 유.” 페터는 악마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관객은 황홀한 무대와 귓가를 맴도는 넘버로 신의 축복을 받은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내년 2월 2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