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 같기도 우주 같기도… ‘빛’을 조각하는 헬렌 파시지안

  • 윤다함 기자

입력 : 2019.11.28 18:18

제임스 터렐 등과 같이 활동한 ‘빛과 공간’ 작가
관람자 움직임 따라 변화하는 빛깔
아시아 첫 개인전, 내년 2월 1일까지 리만머핀 서울

Untitled, 15.2cm(Diameter), 123.2x10.2x10.2cm(Pedestal), Cast Epoxy With Resin, 2019/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Untitled, 15.2cm(Diameter), 123.2x10.2x10.2cm(Pedestal), Cast Epoxy With Resin, 2019/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어릴 적 갖고 놀던 구슬은 그 안에 마치 작은 우주 품고 있는 듯 했다. 오색찬란하고 영롱한 빛을 가두고 있어 아름답고도 묘한 작은 풍경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했다. ‘빛과 공간(Light and Space)’ 조각가 헬렌 파시지안(Helen Pashgian·85)도 구슬에 빛을 담아낸다. 레진을 주재료로 해 단단한 형태 속에 빛을 가두는 법을 연구해왔다. 구슬 형태 외에도 원판, 기둥 등의 모양으로도 작업한다. 조각 내부에 어떠한 분리된 요소가 매달려있거나 끼워져 있는, 혹은 둘러싸인 듯한 형태로 밝은 색의 구 모양 작품을 제작해왔다. 특정 색상이 빛을 반사하고 굴절하는 방식에 따라 빛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조합한 컬러가 특징이다. 작가에 따르면 흰색 벽면을 배경으로 작품을 뒀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빛깔을 감상할 수 있다고.
 
그의 작업은 사방으로 움직이며 관람할 때 더욱 진가가 드러나는데, 모호하고도 일순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빛, 그 빛을 가둔 작품을 바라보는 일시적인 경험은 작가의 작업을 대변한다. 각각의 조각 내부에 독특한 형태의 프리즘을 삽입하는데, 이는 단순히 광선을 전송하는 도구에 멈추지 않고 관람자의 움직임에 의해 구동돼 보는 이가 작품과 맺는 물리적 관계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결국 보는 이의 시각적 인지가 파시지안의 조각을 완성시키는 셈이다. 그가 빛이 작품의 대상이자 주제이며 동시에 단순한 은유나 상징, 혹은 알레고리가 아님을 강조해온 이유다. 파시지안에게 빛은 그 자체로서 매체이자 메시지다.
 
또 다른 연작 ‘렌즈’ 작업은 마치 사람 눈의 수정체와도 같은 구조다. 둥근 원반처럼 생겨 빛의 변화에 반응해 조절하는 매커니즘이 마치 수정체의 그것과 같다는 것.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빛과 바닷물에 반사돼 반짝이는 물빛에 영감을 받아 레진의 물성을 활용해 간접적인 라이트닝이 돋보인다. 측면과 정면에서 보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데, 관람 위치에 따라 기묘한 착시를 경험할 수 있다. 볼록한 원반이 좌대 위에 놓인 형태로, 색채를 발산하고 표면 가장자리는 주변 환경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렌즈 작업이지만, 당시 초기작이 전시 중에 도난당하는 바람에 한동안 렌즈 작업을 중단했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다.
 
Untitled, 30.5x30.5x5.1cm, Cast Epoxy, Circa 2010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1960년대 제임스 터렐, 로버트 어윈, 래리 벨, 메리 코스, 드웨인 밸런타인, 피터 알렉산더 등과 어울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지만 주류 작가로의 진입은 비교적 늦었다. 플라스틱 에폭시와 레진 등 산업 재료의 잠재력을 예술 세계로 끌고 와 영민한 테크닉을 통해 완성해낸 독특한 작품은 다른 ‘빛과 공간’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제임스 터렐은 파시지안을 “‘빛과 공간’ 미술사조의 선구자로서, 언더그라운드 작가의 위치를 유지하면서도 빛이라는 무대에 흠뻑 젖어 작업하는 역설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조각가로서 물질세계를 승화했는데 이제야 그의 노력이 세상에 알려지는 듯하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아시아에서의 첫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율곡로 리만머핀 서울에서 개최된다. 작가의 대표작인 구, 렌즈 작업들이 공개된다. 전시는 내년 2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