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지금 여기⑬] 넥타이 잘린 신사로 가득 찬 백남준의 장례식

  • 임영균 사진작가

입력 : 2019.09.30 11:34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2006년 1월,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젊은 미디어 작가들의 그룹전이 있었다. 전시 기획자가 필자가 소장 중이던 백남준의 사진을 모아 동영상으로 만들어 전시 기간에 상영하고 싶다고 해 흔쾌히 응했다. 오프닝 행사가 끝나고 당시 우진영 뉴욕 한국문화원장이 필자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현재 백남준 선생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면 문화원에선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은 것이다. 나는 “편찮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쉽게 돌아가시진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보약을 많이 드셨고 1980년대에 나와 공연할 때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삼을 드시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필자는 다음날 바로 귀국했다. 그리고 꼭 이틀 뒤 한밤중에 우 원장의 전화를 받았다. 백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우 원장은 문화원에 빈소를 만들려고 하니 백 선생의 영정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고 서둘러 사진을 준비해 이틀 만에 다시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문화원을 찾았다. 수많은 국내외 인사들이 조문하기 위해 빈소를 방문했다.
장례식은 며칠 후 1월 29일 오전 11시 뉴욕 매디슨가에 있는 프랑크 캠벨에서 거행됐다. 장례식은 백남준의 장조카 켄 하쿠다가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엄숙하게 진행되는 장례식과 달리 간간이 조문객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비교적 무겁지 않게 진행됐다. 켄은 어릴 때  백남준과 일본에서 함께한 일화와 뉴욕에서 다시 만나서 보낸 시간을 소개하며 친근했던 사이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날 장례식에 참가한 주요 인사를 소개했다. 휠체어를 타고 참석한 머스 커닝햄과 백남준의 제자와도 같은 빌 비올라, 같은 플럭서스 멤버 오노 요코 등 평소 가까웠던 지인의 회고담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오노 요코는 1970년대 초기 뉴욕에서 백 선생과 함께 겪은 일화를 이야기하며 그의 예언자적 기질과 천재성을 다시금 상기했다.
추모사가 끝난 후 켄은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제안했다. 1960년 백남준이 존 케이지를 흠모해 진행한 넥타이 퍼포먼스를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준비된 가위를 하객에게 나눠주더니 본인이 제일 먼저 나서 옆에 있던 방문객의 넥타이를 잘랐다. 그러자 누구도 불쾌한 기색 없이 서로 넥타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필자는 당시 검은 터틀넥을 입고 있어서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하객이 내 옷 귀퉁이를 잘라주어 그 옷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날 처음 만난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동료의식을 느꼈다. 식이 끝나자 넥타이가 반쯤 잘린 신사들이 메디슨가 거리를 메웠다. 이들은 마주치면 잘린 넥타이로 서로를 알아보곤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백남준을 추모하는 데 동참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확인하는 듯했다. 
1986년 7월 4일 뉴욕 맨해튼 배터리 파크에서 열린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백남준은 지난 200년 동안 미국 정체성을 만드는 데 가장 기여한 예술가로 선정돼 미국 <자유의 여신상>상을 수상했다. ⓒ임영균
“글이 없는 사진 위인전”
그해 10월 맨해튼 첼시 2X13갤러리에서 백남준의 사진전을 하자고 제의가 왔다. 지난 20년간 필자가 촬영한 백남준의 사진을 정리해 전시를 열었다. 전시장을 다녀간 많은 이들 한 중년 여인은 <바이 바이 키플링> 공연사진을 보고 당시 관람석에 자신이 있었다며 감회가 새롭다고 말해줬다. 아트 아메리카의 미술비평가 에레나 하트니는 “여기 전시된 사진들은 글이 필요 없는 위인전”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백남준의 중요한 전시는 물론 퍼포먼스 현장을 담은 사진이 모두 있는 셈이니 그 자체로 설명이 필요 없다고 했다.
어느 날은 백 선생의 미망인 시케코가 전시장을 찾아 사진을 보며 울고 갔다고 큐레이터한테 전해 들었다. 시케코는 내게 손편지를 남겼는데, 백남준을 위해 전시를 해줘 고맙고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다음 날 시케코와 만났다. 전시 출품작을 구하고 싶다고 말하기에 원하면 여기 있는 사진 모두를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이렇게까지 큰 사진은 필요 없고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A4 크기로 백 선생의 독사진만 달라고 해 그렇게 만들어줬다. 겉보기에는 무뚝뚝했던 시케코의 순정을 느낄 수 있었다. 시케코와 함께 다시 방문한 머스 스트리트에 위치한 백 선생의 작업실에는 시케코가 준비한 소박한 일본식 재단이 쓸쓸히 놓여있었다.
◆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