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지금 여기⑫] 뉴욕중앙미술전 이후 삼성전자와 후원계약 성사까지

  • 임영균 사진작가

입력 : 2019.09.23 11:31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1980년대 초반부터 필자는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이던 뉴욕에서 활동해오며 항상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당시 뉴욕 한인 예술계에는 백남준, 김구림, 존배 임충섭 등 훌륭한 한국인 작가가 많았지만, 백남준을 제외하고는 홍보가 부족했고, 그나마 백남준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때는 한국 작가를 적극적으로 소개할 큐레이터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1984년 가을, 백남준의 초청으로 로즈미술관 관장 러셀 코너의 집에서 열리는 프라이빗 파티에 간 날이었다.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 데이비드 로스, 화이트 크리어워트 등 뉴욕의 대표 미술관에서 일하는 현직 큐레이터들이 초청돼 있었다. 그날 백 선생은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내 작품을 보여주며 나를 훌륭한 사진가라고 소개해줬다. 마침 그곳에서 내가 재학 중이던 뉴욕대학교의 그레이아트갤러리 큐레이터인 크리어화이터와 마주치게 되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필자는 한국 예술가를 뉴욕에 소개하고 큐레이팅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현대미술과 전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었다. 크리어화이터에 의하면 작가가 이론적인 배경이 없으면 평론가는 될 수 없어도 큐레이터는 될 수 있다며 용기를 줬다. 심지어 작가 출신 큐레이터는 작가를 평론가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뉴욕의 한인예술가전시를 추진해 보라고 했다. 이를 백남준에게 전했더니 그는 전속갤러리인 홀리솔로몬에 말을 해놓을 테니 언제라도 자신의 작품을 빌려 가 한인교포예술가들과 전시회를 열어보라고 격려해줬다.
필자의 기획으로 1985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뉴욕중앙미술전’에 출품된 백남준의 (1984)은 그의 비디오 작품 중에서는 최초로 국산 TV가 사용된 사례다. 필자가 직접 작품을 설치했는데, 백남준이 잘했다고 칭찬해주어 두고두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다. ⓒ임영균
다음 해인 1985년 6월 28일 뉴욕한국문화원 갤러리에서 필자가 재직 중이었던 뉴욕중앙일보의 후원으로 본인이 기획한 ‘뉴욕중앙미술전’이 개최됐다. 수많은 국내외 관객들이 백남준 비디오 설치 작품을 보러 오프닝에 찾아왔다. 뉴욕한국문화원 직원은 지금까지 전시회에는 한국인들만 오곤 했는데, 이번 전시에는 개원 이래 외국인 관객들이 가장 많이 왔다고 기뻐했다.
전시에는 백남준, 존배, 김구림, 김차섭, 임충섭, 한규남, 문미애, 변종곤, 이병용, 현숙, 신현중, 권정호, 전수천, 김웅, 이일, 황인기, 안형남, 김정향, 조성희, 김테레사, 정동훈 총 스물한 명이었다. 당시 백 선생은 파리 퐁피두 전시 준비로 바빠서 필자에게 <NEW YORK VUSAC>의 비디오테이프 1개와 설치 도면을 그려주며 TV를 어떻게 설치할지 상세하게 가르쳐줬다. 설계도를 바탕으로 백남준의 작품으론 최초로 국산 텔레비전인 삼성 TV를 사용해 작품을 설치했다. 그동안은 SONY 텔레비전을 후원받아 사용해왔다.
그때는 SONY 제품과 삼성 TV의 품질 차이가 극명하던 시절이었다. 소니는 당대 특급 예술가인 요요마, 미도리, 오자와 세이지 등이 카네기홀에서 연주할 때 지원해주고 있었다. 미국인 중산층 가정에서는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소니 TV가 거실에 있었다. 삼성은 미국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품목도 다양하지 않았다. 중앙미술전에서 백남준 비디오 설치작품에 필자가 최초로 삼성 TV를 사용한 것이 계기가 돼 이듬해 1986년 1월 소호에 있는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삼성전자와의 후원계약을 맺게 됐다. 앞으로 전시회에 삼성 TV를 사용한다는 조건이었다. 
◆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