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9.10 20:29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 기억된 미래’
현대 건축가와 한국 근대 문화유산의 만남
고종황제 서거 등 역사 바탕으로 상상한 미래를 예술품으로 구현
덕수궁 중화전 앞마당에 오색빛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반사필름을 소재로 제작된 작품은 옅은 바람에도 일렁이며 빛을 산란하고 춤추듯 화려한 색을 뽐낸다. 이소정과 곽상준이 설립한 디자인그룹 오비비에이(OBBA)가 1902년 중화전 앞마당에서 열린 대한제국의 마지막 전통 연회를 떠올리며, 당시 고종의 먹먹했을 심정을 상상하면서 제작한 <대한연향(大韓宴享)>이다.


고궁 마당에 현대적인 공공 예술품이 들어섰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소장 김동영)가 문화유산과 현대건축의 만남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 기억된 미래’를 2020년 4월 5일까지 개최한다.
덕수궁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장소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산자락 아래 터를 잡은 다른 궁과 달리 도심 한복판 고층 빌딩 숲 사이에 자리한 덕수궁에는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축이 공존한다. 이번 야외 전시는 덕수궁의 이러한 특성을 십분 살려 꾸려졌다. 아시아 기반의 건축가인 스페이스 파퓰러, CL3, 뷰로 스펙타큘러, 오비비에이 등이 모여 고종황제의 서거와 3·1 운동이 발발했던 1919년으로부터 100년이 흐른 오늘날, 대한제국 시기에 미래 도시를 향한 꿈을 현대적 시각과 상상으로 풀어내고 한국 근대문화유산을 배경으로 구상한 작품이 설치됐다.
스페이스 파퓰러는 광명문 중앙 출입구를 액자로 삼았다. 광명문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빛의 스크린을 설치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가상의 공간을 연출한다. 밝은 전자 빛의 문을 통해 가상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미디어 작품 <밝은 빛들의 문>은 디지털 스크린의 시대 속 건축의 변화하는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운 석재와 정교한 기둥, 화려한 처마 등으로 대표되는 왕궁의 건축은 공명정대한 통치라는 이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체의 기능을 했지만, 일제 점령기에 그 지위를 잃어갈 무렵, 건축은 국제주의의 현대식 건물로 더 이상 장식적 의사소통을 하지 않게 됐다. 이제 매체는 주머니에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돼 현대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궁에서 지배자 노릇을 한다. 그 궁의 문은 하나로 연결된 디지털 세상의 플랫폼과 인터페이스이며 동시에 대중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스페이스 파퓰러는 한국의 단청 보수 전문가와 워크숍을 통해 단청 패턴에 관심을 갖고 7개월간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 이번 작품에서 픽셀로 장식된 우리 시대의 ‘밝은 빛들의 문’을 통해 새로운 궁으로 들어서는 길을 내어주고자 한다.
함녕전 앞마당에는 가구가 설치됐다. 고종황제의 침전이던 이곳은 홍콩 건축가 CL3(윌리엄 림)이 황실의 가마와 가구에서 영감을 받아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를 선보인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 왕에서 황제로, 나라 안을 향한 사고는 서구를 향한 개방으로 중첩과 전환이 일어난 점에 주목한 건축가는 건축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전환 공간인 안뜰에 흥미를 가졌다. 전환기의 황제를 위해 디자인한 바퀴 달린 가구를 통해 이동성과 변위, 융통성 개념을 탐구한다. 윌리엄 림은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의 라운지 의자 등 20세기 서구에서 실험됐던 가구의 형태와 조합해 6개의 가구 유형을 디자인했다. 관람객은 가구에 직접 앉아보며 동서양이 만나던 대한제국기의 과도기적 모습과 황제의 일상적 삶을 상상해볼 수 있다.

2014년 베네치아건축비엔날레 대만관 대표작가인 뷰로 스펙타큘러는 석조전 분수대 앞에 <미래의 고고학자>를 설치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먼지가 쌓여 단층을 만들 듯, 수 세기 후 지면과 인간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이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공중에 떠오를 미래의 지면에 맞춰 높인 플랫폼을 통해 저 위의 공중을 발굴한다. 공중에 띄운 이 땅덩어리는 몇 세기 뒤 미래에서는 일상이 될 것이며, 관람객은 솟은 평면을 연결한 계단 위를 올라 수 세기 뒤 미래의 한 시점에 도달하고 발아래 현시점을 과거로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한다.
덕수궁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에는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 중인 오브라 아키텍츠의 120㎡(36평) 규모의 초대형 파빌리온 온실 <영원한 봄>이 설치, 11일 공개된다. 가을과 겨울 전시기간 동안 봄의 온도 항상성을 유지하는 온실로, 파빌리온을 덮은 투명 반구체를 통해 빛이 실내를 환하게 밝힌다. 이를 통해 작가는 기후변화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Copyrights ⓒ 조선일보 & 조선교육문화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