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지금 여기⑨] 백남준과 플럭서스, 플럭서스와 백남준

  • 임영균 사진작가

입력 : 2019.09.02 10:55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건축으로 만들 필요가 없으며, 회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조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또한, 드로잉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회화로 표현할 수 없다.”

전위예술가 집단 ‘플럭서스(Fluxus)’ 멤버인 토마스 슈미트는 플럭서스의 정신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이 말은 1920년대 다다이스트 만 레이가 한 말과 같은 말로, 플럭서스를 ‘네오다다’라고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백남준이 독일에서 활동할 때, 플럭서스 멤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국제예술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
 
백남준과 플럭서스의 관계는 1958년 독일 뒤셀도르프, 퀄른, 다름슈타트 등지에서 시작됐다. 뭔헨에서 고전 음악을 공부하던 백남준이 싫증을 느껴서 찾아간 곳은 당시 전자음악 작곡가로 유명했었던 칼 하인즈 슈탁하우젠의 퀼른 스튜디오였다. 슈탁하우젠과 백남준은 만나자 마자 서로 의기투합해 공동 연주를 하고 <ORIGINALE> 등의 퍼포먼스를 공동 기획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예술가들이 규합하게 됐고 1961년 미국 출신 조지 마키우나스의 합류로 플럭서스 그룹은 다국적 예술가집단으로서 미국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콘서트에 백남준이 샬롯 무어먼과 함께 공연하고 있다. 무어먼은 백남준의 평생 예술 동반자이자 플럭서스의 멤버다. ⓒ임영균
 
1962년 백남준은 플럭서스 창설자 조지 마키우나스가 주최해 독일 비스바덴에서 최초로 열린 <플럭서스 국제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원래 이 행사는 마키우나스가 잡지 ‘플럭서스’를 발행하고 부대행사로 계획한 공연이었는데, 잡지는 출간하지 못하고 공연만 열렸다. 행사 참여자는 조지 브레히트, 필립 코너, 쟝 뒤퓌, 제프리 헨드릭스, 벤 보티에, 사이토 타케코, 에밋 월리엄 등 대부분 음악가였다.
 
플럭서스의 정신적 스승인 존 케이지와의 첫 만남이 이뤄진 곳도 다름슈타트였다. 1964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 전시라고 일컫는 부퍼탈의 <전자음악의 전시> 역시 라인 강변 지역이었다. 플럭서스 그룹에서 영향을 주고받은 백남준 작품의 특징은 퍼포먼스를 할 때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를 사용하고 무작위성과 순간성을 구체화하고 실험한다는 점이다. 이는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도 미술품이 될 수 있다는 미학이나 존 케이지의 모든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백남준이 부퍼탈에서의 개인전에서 발표한 의도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한 13대의 텔레비전과 조작된 피아노 작품 역시 실제 존 케이지의 <준비된 피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1964년 이후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백남준은 텔레비전 영상을 플럭서스 정신으로 다양한 변형을 시도했다. 1967년부터는 아예 TV 방송국에서 직접 연출하기로 마음먹고 뉴욕 WNET 방송국의 프로듀서로서 <Global Groove>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백남준이 이렇게 되기까지 직접적인 영향은 1960년대 유명 미디어 이론가 먀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권력이다’ 이론에 적극 동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작업 초창기에 음악을 연구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텔레비전이 대중화되면서 TV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것에 착안해 음악 전시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텔레비전은 자연스럽게 백남준의 예술도구로 자리 잡게 됐다. 1980년대 초반, 필자가 뉴욕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할 때, 주변의 외국친구들이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이 PBS교육방송에서 정기적으로 방영되는 것에 의아스러워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어떻게 개인의 비디오 작품이 일회성도 아닌 정기적으로 방영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당시 뉴욕 미술계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앤디 워홀조차도 전시회 소식이나 소개하면 그만이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