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8.26 09:00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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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된 신라 돌부처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작은 모니터를 마주 보며 명상을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깊이 깨우치고 명상과 수련을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교리를 비디오로 보여주는 작품 <TV 부처(TV Buddha)>다. 비디오카메라는 실시간으로 불상을 촬영해 불상을 투과하는 통로이자 이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백남준은 동양의 오랜 전통인 불교의 명상을 서양 첨단 기술을 통해 소통하며 미디어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작품은 1974년 뉴욕 보니노에서 처음 발표될 때부터 각각 다른 부처상을 설치해 모니터에 반영해 전시했다. 전시된 작품이 팔려서 새로운 부처상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운반상의 어려움으로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동남아 부처를 구해 전시한 적도 있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 때 사용한 부처는 백남준이 직접 일본에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문화재급 신라 돌부처였다. 신라시대부터 천 년을 넘게 야외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명상을 하고 있었을 돌부처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휘트니에서의 전시가 끝난 후, 돌부처가 분실돼 백남준은 굉장히 아쉬워했다. 이후 <TV 부처> 설치에는 대부분 동남아시아에서 만든 철제 부처를 사용했다. 신라 불상과 동남아 불상은 목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동남아 불상은 목이 가느다래 불안한 반면, 신라나 고려불상은 머리와 어깨 사이를 연결하며 내려오는 목이 안정감이 있다.
오래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었던 박래경 선생이 전화를 해왔다. 백남준이 국내에서 전시할 적에 <TV 부처>에 동남아 부처상을 사용한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말이다. 나는 아마 신라불상은 구하기 어렵고 가격도 만만치 않아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남아불상을 사용한 것이 아니겠냐고 답했다.
실제로 백남준은 존 케이지와의 만남 이후, 수년 동안 계속된 선불교에 대한 이론적 성찰 끝에 1963년 일본 사원에서 선 수행을 체험했었다. 그 후 선불교의 사유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을 퍼포먼스를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비디오를 이용한 설치 작품인 <TV 부처>는 1974년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처음 발표했다. 발표되자마자 미국 관객들로부터 ‘비디오를 활용한 명상적인 작품’이라며 큰 호응을 받았다. 이어서 독일 쾰른 미술관, 암스테르담 국립 슈테델릭 미술관 등에 소개돼 유럽에 처음으로 비디오 조각을 통한 동양의 명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특히 <TV부처>는 그의 비디오 조각으로는 처음으로 2만달러라는 거액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됨으로써 백남준의 초기 창작활동에 큰 보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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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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