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지금 여기⑦] 백남준의 예술을 뒤바꾼 존 케이지

  • 임영균 사진작가

입력 : 2019.08.19 09:58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존 케이지는 캘리포니아에서 과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바흐와 베토벤 음악을 피아노로 즐겨 연주했다. 그러나 고전음악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데 지루함을 느낀 그는 당시 서양음악의 전위작곡가로 이름난 아놀드 숸베르크의 제자로 입문, 작곡을 공부했다. 이후 서양에 불교를 전파한 스즈키 다이세츠로부터 불교를 배웠고 힌두교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우연성에서 돌파구를 찾게 됐다. 특히 개념예술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보고 모든 소리는 음악이 될 수 있다고 깨닫는다.
 
케이지는 공연을 준비하며,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드에게 시계와 악보를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지시에 따라 악보를 바꾸고 피아노 뚜껑을 여닫기를 반복적으로 행하라고 했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뿐 연주는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객석에서 관객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기침 소리 등이 들렸고 공연장 밖의 자동차 소음도 들려왔다. 이렇게 4분33초라는 시간이 흐르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는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던 튜드는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퇴장했다.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이 역사적인 무대가 바로 1952년 8월29일 뉴욕 우드스탁 타운홀에서 공연된 <4분33초>다.
 
존 케이지는 세월을 낚기라도 하듯이 마르셀 뒤샹처럼 혼자서 체스를 두고 있었다. 1988년 존 케이지의 뉴욕 스튜디오에서. ⓒ임영균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
 
백남준은 소년 시절부터 숸베르크에 심취했는데, 동경대학교 졸업논문도 숸베르크 연구였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존 케이지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 여름학교에서 존 케이지의 연주를 처음 들은 백남준은 “마치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회상하며 충격을 받았다. 청중의 머리에 돌을 던지듯 아무런 장식 없는 음악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평소 “인생이 존 케이지와의 만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로 케이지와의 만남이 아주 중요했고 본인 인생의 축복이라고 했다. 실제 백남준의 초기작 <적분된 피아노>를 보면 케이지의 작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케이지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작곡한 곡을 케이지에게 헌정하고, 1970년에는 <Tribute to John Cage> 비디오 작품을 방송용으로 제작해 뉴욕 WNET TV에 방영하기도 했다.
 
백남준이 케이지를 만나기 이전에는 전자음악에 심취한 음악가였다면, 만난 이후에는 확신에 찬 전방위 예술가로서 과감한 퍼포먼스를 통해 실험적인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독일 쾰른 바우어마이스터 스튜디오에서 가진 <존 케이지를 위한 예찬>에서는 비명 소리, 살아있는 암탉이 든 상자, 모터사이클 소음 등을 이용해 우연성을 중시한 공연을 선보였다. 또한 관객석에 앉아있는 케이지의 셔츠와 넥타이를 자르고 곁에 앉아 있던 튜더의 머리에 샴푸를 뿌리곤 거품을 냈다. 그러자 관객들은 자신들도 봉변을 당할까 봐 겁에 질렸고 백남준은 퇴장했다. 소란해진 공연장이 한동안 시간이 지나 조용해졌지만 백남준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공연장에 전화를 걸어서 공연이 끝났다고 알리는 게 그날 공연의 끝이었다.
 
세월을 낚듯 혼자 체스를 두던 존 케이지
 
1988년 어느 여름 오후, 나는 백남준의 소개로 맨해튼 19번가에 있는 케이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그는 세월을 낚기라도 하듯이 여유롭게 홀로 체스를 두고 있었다. 높은 천장의 넓은 창문으로는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대형 화분에 심은 화초들이 케이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친근한 동네 할아버지 같았다.
 
내게 체스를 할 줄 아느냐며 같이 두자고 했지만 잘 못한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한국인이 좋아하는 쌀밥을 자신도 좋아하며, 핀란드 전통가옥과 똑같은 소나무로 만든 한옥을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핀란드 전통가옥도 한옥과 똑같이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조립해서 만들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핀란드와 한국의 인류학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백남준의 스승답게 예술가이면서 문화인류학자였고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가 같기도 했다. 스튜디오의 다른 한쪽에서는 케이지가 표시해놓은 뉴욕 타임즈 기사들을 조수들이 스크랩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백남준이 뉴욕 타임즈 전문기사를 정독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