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8.16 17:38
대표 건축물 ‘석채의 교회’ 등과 같은 시기 작업한 회화 공개
웅갤러리 ‘심해’展 9월 7일까지
“제 미의식의 근저에는 비애와 적막함이 있습니다. 소리 뒤에 여운이, 여운 뒤에는 무(無)가 이어집니다. 저는 유한한 생명과 무한한 자연이 부딪혔을 때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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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타미준(1937~2011)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평소 화가가 꿈이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회화 작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그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세계를 진지하게 사유한 과정을 건축물이 아닌 캔버스에 담아냈다. 그는 “캔버스 위에서 연주한다”라고 말하며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작업하는 등 특유의 감각으로 완성한 화면을 200여 점 남겼다. 특별전 ‘심해(心海)’에서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회화 20점이 공개된다.
작가가 건축가로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는 디지털과 컴퓨터그래픽이 예술계에서 단순 이슈가 아닌 의존의 단계로 인지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였다. 이때 이타미준은 손의 흔적, 신체성 등을 고집하며 독자적인 모더니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건축물을 통해 남겼다. 이번 전시에 내걸린 회화는 홋카이도 석채의 교회와 나무의 교회 등 그의 1990년대 건축물과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한국 본명인 유동룡보다는 일본 이름 이타미준으로 더 익숙한 그는 동경에서 태어나 일본과 한국의 사회·문화적 경계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이를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본인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이를 통해 예술적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고군분투하며, 곽인식, 이우환 등 오늘날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재일동포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함께 의식을 공유했다. 특히 그는 화려하지 않아도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는 한국 도자기와 고미술품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애정과 시각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이번 출품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건축이라는 정형화된 장르로는 쉬 정의하기 어려운 작가의 광범위한 예술적 성찰이 캔버스 위에 절제돼 표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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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특별전은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과의 협력으로 성사됐다. 재단은 작가의 예술세계의 근간을 이룬 한국 전통의 힘이 담긴 건축 정신을 기리고, 토착성과 지역성을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공익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또한 제주도에 이타미준 건축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전시는 9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웅갤러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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