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7.29 10:26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일본인 백남준?
나는 1980년 9월 뉴욕으로 사진을 공부하러 갔다. 당시에는 정부에서 해외여행, 유학 등 출국을 억제하던 시절이라 국가 공인 유학시험 합격자만이 유학할 수 있었다. 나는 1979년 문교부 유학시험을 555번으로 통과하고 남산에서 반공교육까지 마친 뒤에 뉴욕으로 갈 수 있었다. 대부분 유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학비 조달이 어려웠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1981년 여름부터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오 헨리가 즐겨 찾던 식당이 있는 곳인 그리니치빌리지의 한국 야채 가게에 일자리를 구했다.
어느 날 오후 이태리 식당으로 야채와 과일 배달을 갔는데, 식당 주방에서 일하던 한 외국인 친구가 “왜 한국 사람은 대부분 야채 가게나 생선 가게 등 주로 힘든 육체노동만 하느냐”며, 자신은 이태리에서 페인팅을 공부하러 뉴욕에 왔는데 뉴욕에 한국인 예술가는 없냐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비디오예술가 백남준이 한국사람이라고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백남준은 일본사람이 아니야?”
─뉴욕에서 한인예술가 사진전을 계획하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나서서 뉴욕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한국인 예술가를 촬영하고 전시, 출판해 뉴요커에게 한국인 예술가들이 뉴욕에 이렇게 많다는 것을 꼭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촬영자는 당연히 백남준 선생이었다. 그러나 백남준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남준은 여타 뉴욕의 한인예술가와는 달리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화가들 모두가 백남준의 연락처를 몰랐다. 그중 유일하게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다는 정찬승 작가는 백남준이 본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거주지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을뿐더러, 연락처를 묻는 이에게는 우체국 사서함 번호를 알려준다는 것이었다.
─백남준의 전화번호를 입수하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 수업시간 중에 인물사진으로 유명한 하비 스타인 교수가 본인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샤갈, 앤디 위홀 등 뉴욕의 저명예술가의 인물사진과 함께 백남준의 사진도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하비 교수를 찾아갔다. 나는 백남준과 같은 한국인이며 그의 인물사진을 찍고 싶은데, 혹시 백남준의 전화번호를 아냐고 물었다. 하비 교수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뗐다. “이 번호는 다른 이들에게 절대 가르쳐줘서는 안 되네. 내가 전화번호를 줬다고도 말하지 말게.” 나는 212로 시작하는 백남준의 번호를 입수했다.
이에 너무나 기쁜 나는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벽걸이 전화기 옆에 번호를 크게 적어두곤 어떻게 하면 하루 17시간씩 작업으로 바쁜 백남준을 설득해 촬영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에게 처음 전화를 거는 것부터도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나는 뉴요커가 휴식을 취하는 한가한 일요일 오전 11시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약간 어눌한 일본식 영어로 말하는 백남준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나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인데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촬영하고 싶다고, 언제 찾아뵈면 좋을지 물었다.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에 초대받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는 몇 달 뒤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다. 1981년 여름이었는데, 그 당시 퐁피두 전시 준비로 정신이 없다며 전시 개막 후 그해 가을에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 대학에서 강의가 종료되는 11월 넷째 주에 연락하기로 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을에라도 촬영 일정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 내 주변의 한국 유학생이나 작가 중에 누구도 백남준과 통화해봤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통화도 했고, 가을에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시간은 흘러 가을이 됐다. 11월 넷째 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백남준은 내 목소리를 알아보곤 반가워했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도 또 한 번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아닌가. 내년 봄에 다시 연락 달라는 말에 나의 청탁을 돌려서 거절하기 위해 자꾸 뒤로 미루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소년처럼 천진난만하고 가식 없이 나를 ‘임씨’라고 부르며 반가워하는 그의 목소리에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1982년 4월 다시 전화했다. 백남준은 내게 4월 29일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릴 전야제 초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놨으니 그 전시를 보고 촬영하자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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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 스튜디오에서의 첫 만남
1983년 6월 토요일 오전 10시. 백남준과 첫 전화 통화를 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뉴욕 소호 중심인 Mercer St. 110번지에 위치한 1930년대 스타일의 스틸 아이런 건물에 도착했다. 현관 오른쪽에는 여러 개의 초인종이 있었는데 그중 위쪽에 있는 초인종 바로 아래에 ‘PAIK’이라고 그의 성이 타이핑으로 작게 적혀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후 백남준이 직접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으로 내려왔다. 그의 모습은 휘트니미술관에서 공연할 때 입었던 의상 그대로였다. 조금 구겨진 흰색 와이셔츠에 작은 체크 무늬의 바지였다. 건물 엘리베이터는 보안이 철저해 외부에서 출입할 때 열쇠가 따로 없으면 탈 수 없었다. 5층짜리 건물에서 4층 전 층을 사용하는 그의 작업실은 족히 100평은 됐다. 천장이 높았고 공간은 칸막이로 분리돼 사무실, 작품 보관실,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스튜디오를 첫 방문한 내게 그는 ‘Grand Tour’를 시켜준다며 작업장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작품을 설명해줬다. 완성작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주워온 듯한 빈티지 TV와 전축 케이스 따위가 구석에 쌓여있었다. 그러던 중, 비교적 정리가 잘 된 방에 계단 모양의 상단에 창문틀을 설치하고, 앞면에는 주사선만 나오는 TV 모니터의 재미난 작품을 보여줬다. 이 작품이 무척 재미있다고 했더니, 그의 부인인 구보다 시케코의 작품이라고 했다. 당시 구보다 시케코는 미국 저명 미술잡지인 아트인 아메리카 표지를 장식한 유명 비디오 작가였다. 작업실 구경 후에는 분리된 작은 사무실로 안내했다. 여러 종류의 컴퓨터와 크고 작은 모니터, 음향기기, 영상편집기 등 복잡한 전자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공학도의 실험실 같은 이곳은 유일하게 에어컨이 작동되는 방이었다.
─정성스레 차려놓은 점심상
그 좁은 사무실 중앙에는 조그만 테이블이 있었다. 그 위에는 샌드위치, 포도, 바나나, 무화과 과일 잼 쿠키, 프랑스 생수 페리에, 하이네켄 맥주 등이 차려져 있었다. 자리에 앉자 백남준은 “오늘 하루는 임씨를 위해 비워 놓았으니 점심에는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고 맥주도 마시면서 편안히 인물촬영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다른 것은 모두 두 개씩 있는데 왜 맥주만 한 병이 있냐고 묻자, 자신은 당뇨가 심해 술은 못 마신다고 했다.
나는 그간 수많은 사람을 촬영하고 여러 곳을 방문해봤지만 대부분은 바쁘다며 30분밖에 촬영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뉴욕에서 가장 바쁜 예술가로 소문난 백남준은 무명사진가인 나를 위해 하루 온종일을 비워놓았다. 거기다가 정성스럽게 점심상까지 차려놓고 나를 기다려줬다. 무명사진가인 나를 백남준만큼 환대해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뉴욕 타임즈를 정독해라”
나는 음료수를 마시며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그가 지금껏 뉴욕 타임즈, 뉴욕 현대미술관 회보, 종합예술공간지, 여타 신문 등에 기고한 글을 읽어보면 백남준은 예술가보다는 첨단 과학자에 가까웠다. 과학자 중에서도 미래를 통찰하는 미래학자 같았으며,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말할 때면 세계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쏟아내는 문화인류학자 같다고 내 소감을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백남준은 “임씨도 훌륭한 예술가가 되려면 뉴욕 타임즈의 전문 섹션을 꼭 읽어라”라고 권하며 본인의 전문지식 대부분은 뉴욕 타임즈를 정독하며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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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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