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근대미술 전성시대①] 산너머 미지의 그곳, 근대미술

  • 윤다함 기자

입력 : 2019.07.25 18:33

[인터뷰]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근대미술은 과도기적 경계미술”
‘절필시대’展, 9월 15일까지 덕수궁관
정찬영, 백윤문, 정종여, 임군홍, 이규상, 정규… 저평가된 근대 작가 6인 조명
‘식물세밀화’, ‘의곡사 괘불도’ 등 최초 전시

 
바야흐로 한국 근대미술 전성시대다. 국공립미술관부터 상업갤러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를 앞다퉈 내보이고 있고, 한국화랑협회는 지난 5월 문체부에 ‘한국근대미술관’ 설립을 건의하고 나선 상황이다. 지난달 한 미술품 옥션사에서는 미술 시장에서 저평가된 근대 작가들만을 아예 따로 모아 경매를 열어 전(全) 작품이 낙찰되는 성공적인 결과를 내기도 했다. 이에 <아트조선>은 최근 국내 미술계에 불고 있는 근대미술 재조명 붐을 점검해보고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미술의 두터운 토양 복원을 목표로, 한국 미술사에서 저평가된 근대기 작가를 발굴, 집중 조명하는 기획전을 3년마다 열겠다고 선언했다. 기획전 시리즈 ‘근대미술가의 재발견’은 해당 장기 플랜의 일환으로서, 그 첫 주자로 ‘절필시대’전(展)을 9월 15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채색화가 정찬영(1906~1988)과 백윤문(1906~1979), 월북화가 정종여(1914~1984)와 임군홍(1912~1979),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 이규상(1918~1967)과 정규(1923~1971) 등 다소 낯선 이름의 근대 작가 6인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전시타이틀 ‘절필시대’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 시기, 전후 복구기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는 이들 작가 6인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절필할 수밖에 없었던 미완의 예술 세계를 주목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한국 근대미술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당대 혼란스러웠던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체 근대미술이 무엇이기에? 김 학예연구사는 “경계미술”이라고 답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정종여의 ‘괘불도’(1938) 앞에 선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전주 의곡사에서 어렵사리 대여해 온 작품으로, 제작 당시 25살이었던 젊은 정종여의 넘치는 패기와 기백, 새로운 화풍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임영근 기자
 
─한국 근대미술은 일제강점기, 해방과 같은 역사적 배경과 함께한다. 현대미술과 비교해 근대미술을 감상하고 읽는 법에 있어 특징은 무엇인가.
 
“현대미술이 난해하고 당혹스럽다고들 하지만, 친근하고 쉬운 매체이기도 하다. 반면 깊이 공감하기 위해선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근대미술이 아닌가 싶다. 2015년 열린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展) 때, 누군가로부터 ‘이런 그림은 대학교 작업실 가면 널려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냉정하게 따져보니, 근대미술을 오늘날 완벽하게 공감하기는 어렵겠더라. 현대 시각에서는 서양미술의 양식이 미숙한 시기에 그려진 근대미술 작품을 두고 ‘이렇게 못 그린 그림이 왜 미술관에 걸려 있나’ 의아할 수도 있겠다.
 
근대미술은 과도기적인 경계미술이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조선시대까지 내리 이어져온 문화적 전통과 중화권 안에서 형성된 관습이 갑자기 단절되고, 이후 일본 문화의 영향 아래 있다가 해방되며 우리 고유의 것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근대미술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당대 작가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근대미술을 감상할 땐 여러 제약과 급변하는 환경에 맞서 고군분투했던 화가들이라는 점에서 접근하면 좋겠다. 특히나 근대미술은 작가들의 정신성과 전통을 빼놓고는 이야기될 수 없다. 이응노의 정신을 이해 못 하면 그의 추상화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국내 미술계에서 근대미술 재조명이 유행이다. 이러한 시점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무명의 근대미술가들을 한데 묶어 전시 ‘절필시대’를 마련했는데, 해당 전시가 기획된 것은 언제였나.
 
“국립현대미술관은 1998년부터 근대미술 전시를 이어오고 있지만, 아무래도 주요 작가군이 한정적이고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알려야 한다는 고민은 항상 있어왔다. 이러한 고민에 대해 2017년부터 논의가 본격화돼 2018년 가을경 참여 작가 6명이 최종 확정됐다. 처음에는 50명에서부터 시작했다. 해당 작가들의 특성상 작품 확보 가능 여부가 작가 선택에 주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소장품이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려 장르별로 안배하며 점차 그 수를 줄여나갔다. 작가가 10명으로 좁혀졌을 땐 작가간 연결고리를 생각해 서로 엮어질 얘깃거리와 공통점이 있는 이들을 추려 6명이 완성됐다.”
 
백윤문作 <건곤일척> 150x165cm 면에 채색 1939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임군홍作 <가족> 94x126cm 캔버스에 유채 1950 유족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정찬영, 백윤문, 정종여, 임군홍, 이규상, 정규 이들 6명은 공통적으로 화업을 도중에 중단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발굴됐으며, 어떤 기준으로 전시 작가로 선정하게 됐나.
 
“기획 초창기, 분과회의에서 대두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떤 작가를 선정할지였다. ‘근대미술가의 재발견’은 시리즈이기 때문에 첫 주자가 너무 낯설면 다음 시리즈의 성패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란 우려가 들었다. 가능하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회화로 가자는 의견으로 모였고, 회화 작가이면서도 다양한 행보를 보였던 이들, 즉 회화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로도 활동한 작가들을 선정해 그림 외에도 다채로운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이들로 꾸리게 됐다. 다양한 매체 간의 협업을 보여줌으로써도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설명하고 또 왜 잊혔는지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전시 속에 작품으로써 녹여냈다.
 
‘절필시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사전적 의미에서 붓을 꺾은 작가들이라기보다는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시리즈의 방향을 제시하는 후보들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자의든 타의든 붓을 꺾었다는 점을 공통으로 다소 거칠게 그룹으로 묶은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이들 작가가 비주류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왕성한 활동을 펼친 스타작가들이었다는 것이다.”
 
정찬영의 ‘식물세밀화’ 전시 전경 /임영근 기자
 
─당대 유명 작가였음에도 오늘날 대부분 낯선 이름들이다. 변방의 작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재조명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구성하며 어떠한 점에 주력했나.
 
“이번 전시가 그저 6개의 개인전 집합으로 비춰질까 우려됐다. 6개의 개인전을 연달아 보는 피로를 관람객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대 흐름 순으로 하나의 전시로써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자 했다. 대중에게 첫선을 보이는 작가들인 만큼 시각적으로 손쉽게 이해되고 각인될 수 있도록 작가별로 키워드를 부여했다. 정찬영은 ‘식물도’, 백윤문은 ‘풍속화’, 정종여는 ‘풍경화’인 식이다. 아울러 작가 소개가 필연적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를 위해선 텍스트나 아카이브가 필수였다. 이 말인즉슨 전시가 피로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작품 중심으로 구성하되, 텍스트와 아카이브는 영상물을 따로 만들어 그 안에 따로 넣었다. 작가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과 뒷이야기는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5분 내외의 길이로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채색화조화와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낸 신세대 화가 정찬영과 백윤문을 소개한다. 각각 이영일과 김은호의 제자로 ‘근대화단의 신세대’로 등장했으나 해방 후 채색화에 대한 편견이 강해지면서 화단에서 잊혔다. 이번 전시에는 정찬영의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식물세밀화와 초본 일부를 최초 공개한다. 백윤문은 김은호의 화풍을 계승하여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냈고, 남성의 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로 개성적인 화풍을 완성했는데, 전시에는 대표작인 <건곤일척>(1939)이 걸렸다.
 
2부에서는 월북화가 정종여와 임군홍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1940년대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월북 이후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 제외된 작가들이다. 정종여는 수많은 실경산수화와 풍경 스케치를 남겼으며 이번 전시에는 그가 월북 전에 남긴 작품과 자료를 바탕으로 남과 북에서의 활동을 함께 조명한다. 임군홍은 중국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자유로운 화풍의 풍경화를 남겼다. 또한 광고사를 운영하며 직접 그린 관광 브로슈어 도안 등의 초기 광고디자인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3부는 해방 후 현대미술 화단 선두에서 활동했으나 이른 나이에 병으로 타계한 이규상과 정규의 작품으로 꾸려졌다.”
 
─이들이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 보나. 단순히 화업을 중단했다는 이유 외에 다른 배경이 있다면.
 
“작가 6인 모두 작업기간이 짧다. 기껏해야 마흔 살, 길면 쉰 살 남짓까지 활동했다. 이렇듯 기간이 짧다 보니 작품 세계를 완성해 변모하고 완숙의 시기까지 채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와중에 그들의 화업을 이어나갈 후계들도 없었다. 제자들이 많아야 재조명될 기회도 마련되는 건데, 이들을 계승한 이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중 정규는 경희대 요업공예과 교수를 지내면서 도예가들을 배출했음에도 그는 도예가라기보다는 도예교육자 성격이 강해 제자들이 그의 화업을 이어나갔다고 보긴 어렵다. 이외에도 작가들이 절필한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단순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뒀다거나 월북했거나, 혹은 요절했다거나.”
 
이규상作 <구성(Composition)> 65×52cm 합판에 유채 1959 개인 소장/국립현대미술관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연구하고 작품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 짐작한다. 관련 자료는 대다수 소실됐고 흩어진 상황인데, 이 과정에서 고민이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작품 대여에 가장 애를 먹었다. 활동이 중단된 때가 1960년대 전후인데, 지난 60년간 작품이고 자료고 모두 산실되고 없어졌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고 산업화를 통과하며 주거환경이 급격히 변하며 갖고 있는 물건을 많이들 처분했다.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짐을 정리하고 이를 거듭하며 자료가 많이 산실됐다. 좋은 작품을 엄선해 보여주고 싶은 의지가 컸지만, 소장처를 찾고 대여를 협의하는 과정이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작품 소재지도 불분명하고 작품의 진위 검증도 큰 난관이었다.
 
이런 연유로 걸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던 작품들이 너무나 안타깝다. 이규상은 작품 자체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사실 전시를 그만둬야 하나, 미뤄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서 이규상의 제자들을 찾아보니 대다수 돌아가셨거나 생존해있는 경우엔 병환으로 대화가 어려운 상황이더라. 이대로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전시가 영영 불가능하겠기에 어떻게든 작품을 구해 전시를 강행했다. 도록 인쇄 들어가기 일주일 전까지도 작품 대여를 포기하지 않고 사방팔방 수소문해 다녔다. 최대로 구한 것이 11점이었으나, 이번 전시에는 총 7점이 걸렸다.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채널이 한정적이라 유족과 동료화가 등의 인터뷰를 많이 진행했다. 해당 작가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고 하면 집요하게 연락해 궁금한 걸 질문하고 듣고자 했다. 작가의 많은 부분이 인터뷰에 의해 정리됐다. 이를테면, 이규상은 성격이 좋지 않고 주사가 심했다고 알려지는데, 막상 홍대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사교적이지 않은 과묵한 성격이라고 증언하더라. 관련 논문조차 전무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 반면, 논문 없이 1차 사료, 즉 날것의 원재료를 갖고 연구해야하는 상황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점을 발견한 경험도 기억에 남는다. 정찬영은 다른 전시에서 먼저 접해 알고 있긴 했지만, 단순히 일본 화풍의 화조화(花鳥畫)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1차 사료를 읽어보고 다른 작가들이 남긴 언술을 통해 기존 생각은 편견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의 작업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색채인데, 일본화를 본떠 그린 것이 아닌, 창덕궁을 관찰하며 사색한 결과물이란 점이다. 여성화가로서 스케치하다가도 아이 젖먹일 시간이 되면 그림을 멈춰야 했던 일화도 들었다.”
 
─수면 아래 잠들어 있는 더 많은 근대작가들이 있을 텐데, 이들이 빛을 보기 위해서 어떤 움직임과 노력이 뒷받침돼야 할까.
 
“이번 전시를 ‘근대미술의 재발견’이라고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들 작가 6명은 당대의 유명한 스타작가들이자 대학교수들이었다. 이들보다도 더 비주류이고 더욱 닿기 힘든 곳에 있는 작가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시 전람회에 출품한 작가들의 이름을 봐도 대부분 낯설 듯이 말이다.
 
발굴되지 않았다는 건 논문이 없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1차 사료에 대한 검토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솔직히 처음엔 암담했지만, 자료를 계속 추적해가니 의외로 또 발견되더라. 당대의 유명 잡지를 뒤지면 꼭 삽화나 출품작 사진 한 장 정도는 찾았다. 신문이나 잡지에는 작품이나 이미지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이를 토대로 주요 관람회, 작가 생애 조사를 반복하며 하나하나 정립해가는 수밖에 없다. 이후 중요 작가군을 확장해나가야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자료가 새롭게 소개하면서 나 또한 꾸준히 발굴해나가면 될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정종여作 <의곡사 괘불도> 652×355cm 면에 채색 1938 진주 의곡사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자로서 출품작 중 관심 있게 보길 추천하는 작품은?
 
“정종여의 <의곡사 괘불도>를 꼽고 싶다. 진주 의곡사까지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그림이고, 그것조차 1년에 딱 하루, 당일 오전에만 잠깐 걸리는 그림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정말 어렵게 빌렸다. 의곡사 스님을 끈질기게 찾아가 귀찮게 해드렸다. 불화는 ‘화승’이라고 불리는 승려들이 제작하기 마련인데, 일반 화가인 정종여가 의식용 괘불을 그린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이 그림은 전통적인 불화 양식을 따르지 않고 동양화풍의 맑은 채색화법으로 표현됐는데, 굵기의 변화가 크고 리듬감이 넘치는 필선, 인간미가 넘치는 부처의 얼굴 표현에서 파격이 느껴진다. 부처의 머리카락에서 윤곽선을 없애고 부드럽게 처리한 점, 바탕색을 번지듯이 처리한 점에서 일본의 채색화법이 부분적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작 당시 25살이었던 젊은 정종여의 넘치는 패기와 기백, 새로운 화풍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근대미술이라고 하면 일반 회화 위주로 여겨지기 쉬운데, 정종여가 그린 불화를 통해 근대미술의 폭이 넓어질 거라 기대한다.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이라 연구자들도 눈여겨보길 바란다. 높이 6m, 폭 3m가 넘는 대작이라 설치 때 애도 많이 먹었다. 힘들게 갖고 온 만큼 애착이 가는 작품 중 하나다.”
 
─‘절필시대’전(展)은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기획 시리즈의 첫 편이다. 3년 뒤 열릴 두 번째 전시에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작가의 직계, 방계 유족의 기억도 흐릿해져가는 시점이다. 소장자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그나마 남은 작품조차도 흩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자료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가와 관계된 인물들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모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전시 밀도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충분한 조사 기간이 확보돼야 하지만, 이번 전시는 작품과 자료를 수집하는 데 의의를 두고 진행했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고, 본래 학술대회도 더 이른 시기에 마련돼야 했지만 전시기간 말미인 9월 7일 예정돼 있다. 학예연구사로서 내가 먼저 자료를 모으면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연구해 이를 전시에 반영하면 가장 이상적이었겠지만 그 순서가 바뀌어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다.
 
다음 전시는 다른 학예사가 맡을 건데, 이번 전시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좀 더 충실한 기간을 바탕으로 대여가 원활히 진행돼 좋은 작품이 많이 걸리길 바란다. 최근 들어 근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한정적이다. 그래서 낯선 작가들에까지는 미처 발걸음이 미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3년 뒤에는 ‘낯설어도 볼만할 거야’라는 기대감과 신뢰가 다져져있길 바란다. 그때는 근대미술에 대한 이해도도 지금보다 한결 높아져있을 거라 소망한다.”